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석영 (문단 편집) == 생애 == 1943년 1월 4일 [[만주국]] 신경특별시(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창춘시|장춘시]])에서 태어나 [[8.15 광복]] 후 귀국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 [[6.25 전쟁]]이 터졌는데, 가족들이 피난길에 오른 와중에 인천에 배를 타러 가서 한밤중에 배수구에 숨어 있다가 한 무리의 군복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나왔고, 그들이 "'''[[이승만|이박사]]를 지지하느냐, [[김일성|김장군]]을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황석영의 아버지가 "저희는 정치라고는 전혀 모르는 양민입니다.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들어가라"며 보내주었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1918866|#]][* 2004년경 [[중앙일보]]에 연재한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라는 자전 소설에서 소개한 에피소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406241|1. 샛강<21>#]][[https://www.joongang.co.kr/article/407087|1. 샛강<22>#]]][*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1971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4.19 혁명]]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때 친구가 총에 맞고 사망했다고. 1962년 [[경복고등학교]]를 자퇴, 같은 해에 [[사상계]]에서 '입석 부근'이라는 단편 소설로 등단했다. 그전에 이미 '부활이전'이라는 단편으로 지방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전적이 있다. 경복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에 [[황순원]]을 비롯한 원로들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교내 문학상에 투고해서 당선했던 작품인데, 심사위원들에게서 '이건 고등학생이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라는 평을 들었다. 황석영의 등단작인 입석 부근을 처음 읽어본 심사위원들 역시 반응이 '글에서 원숙미가 느껴지는게 40대 중년 남성의 작품 같다.'였었다. 그런데 당선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인물은 빡빡머리의 [[고3]]... 심사위원들이 다들 기절초풍을 했다고. 그런데 '부활이전'이 다른 이에게 도용되어서 지방의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본인이 응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서 당선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한참 방황하던 끝에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다. 군 수사대로 복무하며 베트남 전쟁의 배후에 대해서 파악하게 되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의 그늘'을 쓴다. 본인이 말하기를 그전까지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역사나 정치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비록 베트남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런 역사관은 <한씨 연대기> 같은 나중의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황석영의 누나가 군의 [[높으신 분]]과 사귀는 관계였기 때문에 황석영이 군 수사대로 전출되는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http://legacy.h21.hani.co.kr/h21/data/L000612/1p946c04.html|한겨레21인터뷰]] 특혜 여부와는 별개로 본인이 [[PTSD]]를 앓았다는 전적이 있다고 알려져있다. 잠결에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누이를 꿈속에서 맞닥뜨린 적군으로 오인하고 화병으로 누이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는 적과 맞딱뜨린 적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낙타누깔'이나 '돌아온 사람' 같은 작품에서는 PTSD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데, 한겨레21과의 인터뷰가 맞다면 본인 경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한겨레21과 베트남전 관련 인터뷰를 했는데, 중대기지에서의 방어전술을 구사한 한국군의 전술과는 거의 상관도 없는 웨스트모어랜드의 색적섬멸 등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참전당시 위험지역에 투입되거나 작전을 직접 수행한 적은 없는 것으로도 생각되며, 이후로도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도 생각된다. 본인 스스로도 짧게 투입된 전투에서조차 적을 본 적도 없다고 했고, 이후는 후방에서 복무했다.[[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0906/1p949601.html|#]] 그렇다면 황석영은 왜 자신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PTSD를 겪게됐다고 이야기 했을까? 황석영은 베트남전에서 적과의 직접적인 대면은 없었지만 대신에 전쟁터에서 수많은 시체들과 마주하였고 이것이 베트남 파병이후 귀신처럼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다들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 것이 전쟁터에서는 PTSD 없는 사람 없다. 사람을 직접 죽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까지도 살아있었을 누군가가 죽어 발견된 광경을 보고도 멀쩡하다면 그건 이미 맨정신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신념적 이유 등등이 합쳐져 극도로 단련되었거나(그럼에도 충격받을 사람은 충격받는다) 아니면 이미 무감각해졌거나.] 그리고 이런 트라우마를 글쓰기로 극복했다고 한다. 제대하고 귀국한 뒤인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탑'이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활동한다. 2000년대 이후에 황석영을 알게 된 젊은 독자층에서는 황석영을 그저 여러 가지 잡다한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이야기꾼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단편 소설을 위주로 치열하게 문학 세계를 형성했던 작가였다. 프랑스에 소개되었을 때 한 문예지로부터 "고통을 지나치길 거부하는 글쓰기, 그러나 동시에 파멸에 굴복당하길 또한 거부하는 글쓰기.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위대한 도전이 될 이러한 글쓰기를 황석영은 성취하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70년대 이후부터는 [[광주광역시|광주]]로 내려가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한다. 본인이 밝히기를 <무기의 그늘>과 <장길산>이 공식적으로 완간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지만 실질적으로는 70년대 말에 집필이 끝난 상태였으며 80년대 초반의 대부분을 민중 운동에 할애했다고. 마찬가지로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 조직에 몸 담았던 전용호씨는 "1978년부터 1986년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은 작가이기 전에 광주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1250.html|민중문화 운동가]]이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230113007|민주화 운동가였다]]"고 말한다. 1985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은 기록물《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2만권이 압수되면서 [[금서]]로 지정되고, 나병식 풀빛출판사 사장을 포함한 관계자가 대거 구속되었고, 황석영 본인도 경범죄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류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넘어 넘어>로 불리던 이 책은 학생운동권과 민주화운동가들의 필독서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져나가면서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초판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으로 되어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저간의 사정이 복잡하다. 1989년 3월에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에 응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 대변인 자격으로 일본과 중국을 경유해서 방북하였다. 이후 1989년 한해에만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바오로 신부]]들의 방북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이전해 7월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등을 담고 있는 [[7.7선언]]을 발표하고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 및 동구권,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가 본격화되자,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황석영을 포함한 [[민족문학작가회의]]도 남북 작가 회담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황석영이 방북을 한 것이다. 당시 황석영은 방북 한달전에 안기부와 집권 민정당 사무총장 이종찬 의원쪽에 북한 방문 계획을 사전에 통보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가 서로 엇갈리는데, 황석영은 방북 직후 "이종찬 사무총장, 안기부 관계자들에게 분명히 방문의사를 타진해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종찬 의원은 단순히 방북계획을 통보받았을 뿐이며 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다고 해명했다. 이 때문에 [[이종찬(1936)|이종찬]] 사무총장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더불어 둘의 만남을 주선했던 [[김상현(1935)|김상현]] 평민당 원내총무도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다. 정부에선 북의 대남선전공세에 말려들 수 있다면서 방북을 반대했는데 황석영쪽에서 일방적으로 방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여튼 정권쪽에서 사전에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건 사실로 보인다. 황석영은 1988년부터 공공연히 '내년에 평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황석영은 평양에 머무르면서 북쪽과 여러가지 문화교류, 남북협력 사업에 합의하였지만, 남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하겠다는 강경방침을 세우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과 독일 등을 떠돌아 다녔다. 이 기간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4차례 추가 방북하였으며 (물론 정부 허가는 당연히 없고) [[김일성]]도 여러차례 만나서 추켜세워주고[* 당시 평양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우렁차게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추적 60분]]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당시의 추적 60분 진행자는 [[고성국|이사람]]. 하긴 평양 한복판에서 다들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혼자서 외치지 않으면 뻘쭘한 상황이기는 할 테니... ][* 김일성이 장길산의 애독자더란다. 이상할 것도 아닌 것이 북한에서는 전근대의 반정부적 성격의 민중봉기를 '봉건 계급주의에 맞선 인민의 투쟁'으로 재평가하고 있는 데다, [[임꺽정]]의 경우는 1987~1989년에 그를 주인공으로 북한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5부작 극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홍길동전]]도 1986년에 북한에서 영화화되었는데, 홍길동에 대해서 "길동이 수령으로 의리에 끌려 봉건 통치 배들과 타협한다거나 첩의 자식으로 비극을 겪은 그였지만 그 역시 율도국 왕이 돼서는 첩을 거느린다"고 비판하면서도 홍길동전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길동이 농민봉기군을 이끌고 율도국을 세워 착취와 압박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려는 당시 인민들의 목적지향이 뚜렷이 반영된 소설"이라 평가한다고.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d1b5c77cbb38d654c0b0cc45/fe-hk-10112019155859.html|#]] ] 범민족대회 등의 행사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북 당시 경험을 다룬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창작과비평]]에 연재했으나 이시영 주간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해당 작품은 [[이적표현물]]로 판정되었다.[* 훗날 2019년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에서 개최한 '[[http://m.gcilbo.kr/news/articleView.html?idxno=18800|명사초청 통일대담]]'에 참석한 황석영은, 당시에는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반국가단체(사실상 북한)에 대한 찬양을 금하는 조항)에 대한 반발 심리로, 북한에 대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마음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북한에 대한 긍정적 이야기 위주로 썼다고 한다. 2022년 현재로선 작가 스스로 보기에도 꼴도 보기 싫다고 했다는데 그게 책이 편향적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방북 때문에 자신이 오랫동안 겪었던 고초를 떠올리게 해서 싫다는 의미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이후에 창비에서 황석영의 해당 방문기를 요약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문익환]] 목사를 따라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여러 번 만났으며[* 이 과정에서 황석영이 김일성에게 25만 달러를 받았다. 황석영은 이 돈을 장길산 영화화에 대한 원작료라고 주장하였고, 법원은 이것이 아니라 이른바 출판문화사업을 하기 위한 자금으로 보고 국가보안법 제5조 제2항 소정의 금품수수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https://casenote.kr/%EB%8C%80%EB%B2%95%EC%9B%90/94%EB%8F%84930|#]] 2015년에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황씨가 김일성에게 하사받은 25만 달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노래]]를 편곡해 영화를 제작했다. 김정은 정권이 이 노래를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목청을 높이면서 속으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고, 황석영은 이에 대해 자신이 김일성에게 25만 달러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은 당시 장길산 애독자였던 김일성이 "장길산을 남북합작으로 영화화하자"는 얘기를 해서 계약을 한 것으로(정부 당국에서도 합작을 허가하였다고), 그때 계약 조건으로 자신이 부른 돈이 4억, 달러로 치면 (당시 환율로) 50만불인데 절반은 북측에서 부담하고 절반은 남측에서 부담하자는 내용으로 계약서를 썼으며, 25만불 건은 '장길산'과 관계가 돼 있는 것이지, '임을 위한 행진곡'이랑은 아무 상관이 없고 그나마도 자신이 받은 25만 불은 뒤에 귀국 전에 다시 돌려주었다고 반박하였다. [[http://mnews.jtbc.joins.com/News/Article.aspx?news_id=NB10891506|#]][[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7/13/1993071373105.html|#]][[https://imnews.imbc.com/replay/1993/nwdesk/article/1757428_30684.html|#]][[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4594.html|#]][[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672|#]][[https://books.google.co.kr/books?id=EpMnDwAAQBAJ&pg=PT233&lpg=PT233&dq=%EC%9E%A5%EA%B8%B8%EC%82%B0+%EB%82%A8%EB%B6%81%ED%95%A9%EC%9E%91+%EC%98%81%ED%99%94&source=bl&ots=WX8ukVKKAI&sig=ACfU3U3ZmuDBKFX338MPySvukqf9CGAhkw&hl=ko&sa=X&ved=2ahUKEwiAuuWfpY3uAhVHyosBHXREBCo4ChDoATAJegQIBhAC#v=onepage&q=%EC%9E%A5%EA%B8%B8%EC%82%B0%20%EB%82%A8%EB%B6%81%ED%95%A9%EC%9E%91%20%EC%98%81%ED%99%94&f=false|#]][[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58806#0DKU|#]] ] 1993년 4월 27일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나중에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때 상황에 대해 말하기를, 망명생활하면서 뉴욕에 있는 와중에 그의 소설 장길산의 남북합작영화 제작 이야기가 나오고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 분위기가 조성되는 와중이라서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될 것이라 생각하고 귀국을 결정했는데 하필 귀국하고 2심 와중에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나왔고, 20여 일 이후에 김일성이 사망했다. 본인이 말하기를 '''이틀 동안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을 못 잤다'''고..] 1998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 바로 특사로 풀어줬다.[* 사실 문익환 목사부터가 10년형을 언도받고 3년 6개월만에 출소했기 때문에, 문익환 목사의 대변인 자격으로 방북했던 황석영 자신이 그보다 오래 구속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를 즈음해서 [[김현철(1959)|대통령 아들]]이 구속되는 바람에 사면 이야기가 쑥 들어가버렸다나...] 2000년 8월 8.15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의 허가를 받은 공식방북단 300여명의 일원으로 다시 북한을 방문하였다. 기념행사 과정에서 방북단 내부에서 [[남남갈등]]이 벌어지는 등 여러가지 평지풍파가 있었다. ~~하여튼 사고를 몰고 다니는 남자~~ 방북 이후 '선명성 경쟁, 좌경화가 문제다'라면서 급진적인 통일운동단체들 특히 자신이 과거에 관여했던 [[범민련]] 등을 비판하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남한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에서 범민련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되었다. 첫 번째는 남북 민간 차원의 순수한 통일운동체를 표방하지만 북한에 순수한 민간조직이 어디 있냐는 비판으로 단체 창립때부터 나온 것이다. 두 번째는 의도는 민간통일운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북의 대남공작 거점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이다. 범민련 초대 위원장이었던 문익환이 이런 관점에서 범민련 해산과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결성을 준비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세 번째는 극단적인 통일지상주의자, NL강경주사파들이 범민련을 장악하면서 북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북한딸랑이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일본 교도통신 기자 세키가와 나쓰오가 저서 <북조선: 마지막 신의 나라>[* 한국에선 1993년에 [[연합통신]] 출판국이 냈다.]에서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4026454?sid=110|그를 깠다.]] 황석영은 2000년 방북 과정에서 범민련 등의 노골적인 종북행보가 대다수 대중들의 반감을 사고, 조중동과 우익에게 색깔론의 빌미를 준다고 우려했다. 이후로는 범민련, 통일연대 등과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 운동가로서의 활동과는 별개로 창작욕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방북 이후 남과 북을 보는 눈에 있어서 "'''휴전선 위 상공에 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면서 남과 북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한편으로, 귀국 이후 투옥 및 석방에 이르기까지 공백 기간이 길었던(본인 언급만 빌리면 '''15년''')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방북 결정에 대해 "'''(그렇게 공백이 길어질 줄 알았다면) 지금 같으면 안 간다'''"고 대답했다. 위에서 자신이 쓴 기행문에 대해 꼴도 보기 싫다고 한 말은 실은 그 지긋지긋했던 고초를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일지도.] 그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에 쓴 창작물들은 몇몇 단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프로파간다]]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재개한 것은 북한을 방문한 뒤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을 마친 뒤다. ...그러나 2009년 결국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3122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NEW_GB=|이런 길]]을 걸음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누굴 지지하느냐야 사람 마음이지만 때가 때였던지라...결국 [[진중권]]에게 비판을 받았다. 해서 5월 15일 한겨레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5124.html|이런 인터뷰]]를 하여 자신의 뜻이 와전되었다는 뜻을 밝혔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5061.html|많은 비판을 받았다]]. 같은 시기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스스로를 B급이라고 자처하는 급진좌파 [[김규항]] 같은 경우는 [[손학규]]를 지지하던 사람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게 어째서 변절이냐고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황석영과 손학규는 1970년대 노동운동을 위해서 같은 공장에 위장취업해서 활동하기도 했고 그 뒤도 평생 친분을 유지한 사이. 손학규의 2007년 한나라당 탈당도 황석영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위의 행동을 [[노벨상]]을 타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작 황석영 본인은 자신은 노벨 문학상이랑 얽히는 게 싫어서 스웨덴에서 책이 번역되었을 때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황석영은 2000년대 초반에 노벨 문학상 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며 [[고은(시인)|고은]]을 깐 적도 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진작 노벨상을 받아야 했어야 할 사람으로 [[르 클레지오]]를, 앞으로 노벨문학상을 탈 사람으로 [[오르한 파묵]], [[모옌]], 황석영을 꼽았는데 앞의 세 사람은 각각 2008년, 2006년, 2012년에 모두 수상했다. 유일하게 황석영만 못타고 있는 상황. 저 행보를 걷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MB정권이 희망이 없다며 지지를 철회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59067.html|기고문]] 지지 철회라고 해도 MB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실망을 표한 것 뿐이다. 다만 남북관계에 쐐기를 박아버린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아직 발생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으로 몽골을 개발시키겠다는 '알타이 연합론'은 아직도 지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환빠]]와 엮고 있는데 어디에서도 대쥬신이나 환단고기 언급을 한 적 없으니 이유없는 매도는 지양해야 한다. [youtube(GycOdX5xzV0)] [youtube(-wKx3ttocx8)] 2008년 [[MBC]]의 예능 프로그램 [[강호동]]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가[* 그만큼 한국 근현대사가 엄청나게 롤러코스터를 탔고 황석영 자신이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도 많다는 뜻이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걸어다니는 한국 현대사'''.] 대중에게 큰 어필을 하였다. 당시 무릎팍도사 패널이었던 유세윤은 그를 두고 '''문학계의 황 [[포레스트 검프]]'''라고 평했을 정도.[* 나중에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도 이 별명이 똑같이 언급된다.] 우스개로 "'''황석영 가는 데 가지 마라. 큰일 난다'''"는 말도 돌았다고... 2012년 문학인생 50주년 맞이 축하연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이수호]] 서울시교육감 후보 지지선언을 하였다. [[2017년]] 9월 6일과 1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2회에 걸쳐 출연, 패널들에게 황석영 자신의 문학 인생과 자신이 겪었던 한국근현대사에 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특히 [[광주항쟁]]을 회고한 두 번째 방송은 시청률 5.6%로 방송 당일 자체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같은 시기에 개봉되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영향도 있었던 듯 하다. 2019년 10월 7일 [[공지영]] 등 작가 1276명과 함께 대표발의자로 [[조국(인물)|조국]] 장관 지지성명을 냈고, 취재진을 만나 서초동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실을 언급하며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https://m.news.naver.com/memoRankingRead.nhn?oid=081&aid=0003034091&sid1=102&date=2019100716&ntype=MEMORANKING|기사]] 2020년에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내놓았다. 마포구의 서교빌딩에서 있었던 출판 기자 간담회에서 본작을 배포할 때, 속 표지에 사인과 함께 이런 문구를 써 넣었다.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한 줌 먼지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것입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