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화(1913) (문단 편집) === 중일수교와 중미수교 === 1977년 제11기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파견한 일본 외상 소노다 스나오와 회담하여 중일수교에 대한 담판을 지었다. 결과 1977년 8월 12일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에 성공했으며 1978년 10월 덩샤오핑의 방일을 수행하여 [[쇼와]] 덴노와 덩샤오핑의 회담에 배석했다. 1977년부터 미국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와 만나 중국과 미국 수교 협상에 참여하여 미국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필요할 경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1978년 5월 21일 방중한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와 만나 세계 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소련-서방 세력균형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이후 1978년 6월부터 워싱턴을 방문하여 중미수교를 위해 열정적으로 논의했으나 11월에 병으로 입원하여 보좌관인 한녠룽이 대신 참석하였다. 12월에 퇴원하여 다시 중미수교에 대해 논했고 [[장징궈]]에게 더 이상 무기를 팔지 말라고 요구했다. 결국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미국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19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하자 그를 수행했다. 1980년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며 80년 12월, 일본 외무장관 이토 마사요시와 일본 해외경제협회기금에서 장기 우대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협정을 체결하여 일본으로부터 많은 차관을 받아냈다. 1981년 기니 정부로부터 기니 국가영예훈장을 수여받았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자 이를 항의했다. 1982년 12기 중앙위원을 역임했으며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브레즈네프를 칭송하며 중소관계의 호전을 꾀했다. 귀국 후 외교부장에서 사퇴했다. 1983년부터 88년까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7년 당중앙 고문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어 1992년 폐지될때까지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