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회평군 (문단 편집) == 민진용의 난과 최후 == 그러나 3년상이 끝난 1844년([[헌종(조선)|헌종]] 10년) 8월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몰락한 [[노론]]계 인물 민진용이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하여 역모를 일으키려다 적발된 사건(민진용의 옥사)에 엮인 것이다. 민진용은 [[노론]] 재상이던 대사헌 민응수[*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시중의 손자.]의 4대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래 전에 몰락하여 [[중인]]이 되었고, 민진용은 [[무인]]으로 생활했다. 가담자 중 이원덕은 의원으로 [[전계대원군|이광]]의 지인이었고, 박순수는 양아버지 박종훈(朴宗薰)의 음덕으로 음서로 관직에 올라 부사를 역임했다. [[순조]] 말기부터 [[헌종(조선)|헌종]] 초기까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주로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조선)|김유근]], 7촌 조카 김홍근(金弘根)이 쌍두마차가 되어 좌지우지하다가 1844년(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났다. 그러자 권력에 틈이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이 때를 노려 민진용 일파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문제는 이원경이 이 역모에서 임금으로 추대될 대상이었던 것.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다들 상당한 중형을 받았는데 주동자는 전부 [[끔살]]에 단순 동조자도 [[귀양]]을 갈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실제로 참여는 안했다 해도 왕으로 선택된 대상이었던 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참고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이 일이 있은 후 민진용 [[항렬]]의 '용(鏞)'을 '호(鎬)'로 바꾼다. 바로 [[고종(대한제국)|고종]] 시절 외척 세력이던 [[명성황후]]와 [[민태호(조선)|민태호]], [[민승호]], [[민겸호]] 등이 민진용과 같은 항렬이다.] 결국 [[삼사(조선)|삼사]]와 [[의금부]]에게서 계속 [[탄핵]]을 당하다 같은 해 9월 6일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향년 18세(만 16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