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령대군 (문단 편집) == 생애 == [[왕자]]인 대군 시절에 특별히 사건은 없는 편인데 태종 10년(1410) 인녕부(仁寧府) 행수(行首) 이호(李護)가 효령대군에게 청탁하여 호조의 [[벼슬]]을 얻었다가 태종에게 들통이 난 사건이 있다. 태종은 "어린아이를 통해(효령대군은 당시 14살) 이름을 얻으려 했으니 죄를 주어야 하지만 이름을 얻으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죄를 묻지는 않고 파직만 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효령대군을 두고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태종(조선)|나]]와 [[원경왕후|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6003_001|#]] 온화한 성품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나 위아래로 [[양녕대군|형]]과 [[세종(조선)|아우]]의 임팩트가 강하고[* 다만 그 임팩트의 방향성은 정반대. 그 형님은 조선사에 손꼽히는 개망나니라 틈만 나면 부왕한테 혼나느라 임팩트를 남겼고 그 아우님은 조선사에 손꼽히게 화기애애한 부자지간으로 임팩트를 남겼다. --패륜아와 영웅 사이에 불상이 설 자리가 없는 것과 같다.--] 효령대군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아들이었는지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도 그의 졸기에 조금 이야기가 있긴 한데 활쏘기를 해서 다섯발 쏘아 다섯발 모두 맞춰 감탄하게 만들었다거나 태조가 아플 때 직접 탕약을 올렸다거나 잠저 시절의 세종과 사이가 좋아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정도가 있다.] 아래 일화와 태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우애]]깊게 지내라고 강조한 일화가 거의 전부. 그 밖에 효령대군의 가신과 가노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문제가 된 사건이 조금 등장하는데 가노 등이 주인의 뒷배경을 믿고 잘못에 연루되는 일은 조선시대 왕자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야사(역사)|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폐세자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 갑작스럽게 [[책]]을 펴고 [[공부]]하는 척했지만[* 그런데 실제로도 효령대군은 동생인 충녕대군만은 아니겠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인지 졸기에 독서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자주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형 [[양녕대군]]이 "헛짓거리 그만하라!"하며 꾸짖었다고 하는데, 딱히 [[정치]]적 배경이 없던 효령대군이 정말로 [[왕위]]에 욕심을 낸 정황은 없을뿐더러 양녕대군이 누구를 훈계할 처지도 아니었고 효령대군도 파는 [[불교|분야]]가 워낙 매니악해서 그렇지 공부에 관해서라면 하는 척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는 경전을 해석하고 교리를 익히는 등 작정하고 파고들면 의외로 상당한 공부를 요하는 분야이며, 불교도 그 성격상 제왕학과 거리가 있어서 그렇지 마찬가지다. 애초에 '공부'라는 말의 어원이 불교 용어일 정도. 이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전근대의 고명한 종교인은 당대에 손꼽히는 석학인 경우가 많았으며, 현대에도 신부가 되려면 수 년간의 공부를, 승려가 되려면 거기다 시험까지 봐야 하는 등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다. 더구나 효령대군의 동생은 조선 역사를 넘어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먼치킨급 천재이고 형도 그 개차반 성격을 못 죽여서 그렇지 의외로 정치적 감각이 없진 않았던 판에 효령대군이 머리가 나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효령대군은 말년에 다른 형제들보다 오래 살아[* 양녕대군은 68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했고, 세종도 52세에 사망해 당시 기준으론 그래도 명대로 살다 간 편이지만, 효령대군은 '''90세'''에 사망해 현대인을 기준으로 봐도 매우 오래 살았다.] [[종친]]의 높은 웃어른으로서 영향력이 커졌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양녕대군의 모습은 전형적인 [[한량]]이고 효령대군은 정치에 큰 뜻이 없는 인물로 보이는데 야사에서는 오히려 둘의 성격이 정반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신기한 점이다. 야사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번뇌(괴로움)를 씻기 위해 [[절(불교)|절]]에 들어가서 북 가죽이 늘어지도록 북을 쳐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효령대군 북 치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럼에도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세종(조선)|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양녕대군이 폐세자될 때 [[세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태종은 효령대군이 지나치게 점잖은 [[성격]]이었고 [[술]]을 일절 못 마시기 때문에 술 마실 일이 많은 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3남 [[세종(조선)|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참석한 기록은 있는데 이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얼굴을 비춰야 하는 연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아들이니 왕만 넘어가주면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다. 고작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로 왕같이 이것저것 따져야하는 중요한 직책을 바꾼다고 어이없어 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근대에 술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주량]]은 그 자체로 [[체력]] 측정의 한 방편이 되었을 정도이고[* 괜히 전근대 [[영웅]]들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당과 말술이 등장하는게 아니다. 조선시대 여경이라 할 수 있는 다모 선발 조건 중에는 막걸리 5 사발을 한번에 마실 수 있는지 검증하는 것도 있을 정도였다.] 왕은 결국 [[정치인]]으로서 [[술]]이란 것을 자주 마시는 자리이다. 특히 술을 못 마신다는 건 그야말로 [[약골]] 중의 약골로 취급당한다. 한마디로 충녕대군보다 형이었던 효령대군이 체력이 한참 더 딸려서 걱정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세종 역시 [[건강]]한 편은 아니라서 이미 30대 때부터 툭하면 몸져눕던 판이라 세자인 이향([[문종(조선)|문종]])이 10대 초반부터 사신을 접대해야 할 정도였다.] 이미 처가를 조지고 사돈댁도 박살낼 준비를 하면서 강한 [[왕권]]을 물려주려 혈안이 되어있던 태종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관료와 종친 생활을 경험한 태종의 입장에서는 연회 자리에서 입에 잔도 안 댈 정도로 융통성이나 임기응변이 없는 효령대군이 살벌한 [[정치]]판에서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는게 당연한 일이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중국 사신 접대를 운운한 것을 보면 [[요동]] 정벌 부르짖던 [[정도전]]을 쳐내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 노선을 확립한 태종으로서는 효령대군의 이러한 태도가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효령대군이 [[불교|불도]]에 그렇게 심취했던 점을 생각하면 술 문제는 효령대군의 사상적 부적격성을 에둘러 드러낸 것일수도 있다. 사실 고려 불교 문화와 조선 유교 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불교]])와 술([[유교]])일 정도다. 효령대군이 본격적으로 불도에 정진한 시점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효령대군이 아버지 정안군의 잠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해도 어렸을 때 입궁해 왕족 [[교육]]을 받았음을 생각하면 충녕대군처럼 아무리 못 마셔도 몇 잔 받아 넘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조차도 거부할 정도라면 이미 이 시절부터 불도에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개국 [[군주]]인 태조가 [[무학대사]]를 왕사로 초빙하고 재위 내내 법회를 여는 등 친불교적인 성향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조선의 유자들은 개국 초부터 내내 불교를 비판하고 배척했으며 태조 이후 왕들의 불사도 어디까지나 죽은 [[가족]]에 대한 추도의 목적[* 이 경우 행위는 불교적이더라도 그 목적이 유교적 효와 애의 달성에 있었으니 비판을 막아낼 명분이 되었다.]이 강했지 불도에 귀의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조 같은 개국 군주도 아니고 새로 즉위할 [[후계자]]가 벌써부터 공공연히 불제자임을 드러내고 다닌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특히나 조선 유자들의 입장에서 불교가 문제가 되는 것이 불사 1번 치르고 절을 세우고 하면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재정]] 지출을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데 정치의 지향점이 있었던 나라였던만큼 불교적 행위에 대한 비판에는 꼬박꼬박 돈 문제가 등장했다. 주류 관료층으로서는 향교나 서원처럼 [[국가]] 이념에 기반한 [[교육]]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성이나 병영처럼 [[국방]]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그저 목탁 두드리며 염불이나 외는 절간 따위에 돈 들어가는 짓을 [[극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 술도 못 마신다 운운은 [[왕실]] 체면상 차마 왕의 적차자가 [[불경]]이나 읊고 다녀서 왕이 못 된다 할 수는 없으니 우회적으로 문제를 지적했을 가능성이 있다. 술 문제는 영특했던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폐세자 논의 시점에서부터 이미 장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는데 장자조차 폐세자 되는 판에 새삼 순번을 지키겠답시고 굳이 둘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태종이 고작 술 못 마신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효령대군을 제치고 충녕대군을 택한 것이 아니다. 술 문제가 하도 임팩트가 커서 요것만 쏙 빼서 회자되고는 하는데 태종의 말 앞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 자세하게 조목조목 일을 처리함.] 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태종(조선)|나]]와 [[원경왕후|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세종(조선)|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기사 이 바로 다음에 [[술]] 문제가 나온다. 이를 이어보면 한마디로 효령대군은 군주의 자리에 앉기에는 너무 순한데다가 융통성도 없어 도저히 [[조선/왕사|후계자]]로 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술]]은 어디까지나 이런 효령대군의 성품을 방증하는 사례 중 하나로 거론되었을 뿐이다. [[태종(조선)|태종]]은 [[6조직계제]]로 조정을 모조리 자기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며 [[의정부]]를 뒷방 노인정으로 만든 사람이다. 당연히 [[조선/왕사|후계자]]의 일머리에 높은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후계자의 교체는 승계의 원칙이 흔들린다는 측면에서도 문제지만, 그동안 후계자에게 투자된 유무형의 자원들을 한순간에 매몰비용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부담이다. 양녕대군은 거의 14년 가까이의 세월을 세자로 살면서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엘리트 자원들이 세자의 스승으로 투입되었으며, 이때면 태종도 나이가 있는 만큼, 다시 14년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양녕을 대신해 책봉될 세자는 그 14년의 간극을 메우고 후계자 노릇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형제간의 서열만을 따져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나 이미 빠른 양위를 결심했던 태종으로써는 더더욱 그랬다. 다만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야심만 큰 경우도 있고 보통은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조선/왕사|대권]]을 얻을 기회가 오면 조금이라도 욕심이 생기는게 보통 사람의 [[심리]]인데[* 당장 동생 충녕대군이 온순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오자 대권에 대한 야심을 보인 인물이다. 물론 이쪽은 능력도 출중했기에 자신이라면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뒷받침된 경우지만.] 차기 세자 책봉을 놓고 효령대군이 특별히 계승권을 주장하거나 계승에서 배제되고 나서 실의에 빠졌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 형제들의 첫째 큰아버지 되는 [[진안대군]] 이방우가 조선 건국 후 세자가 되지 않고 잠적하다 술병으로 죽은 것에 대해서 고려에 대한 충의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예 정치적으로 배제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이 때문에 실의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내다 그리 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서양 역사를 막론하고 동생에게 밀려 계승권에서 밀린 형이 불만을 품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효령대군은 알려진 일화조차 별로 없을 정도로 잠잠했다는 것.] 사실 조선의 국시인 유교의 장자 계승 원칙에 따르면 좋든 싫든 효령대군에게는 차순위 적장자로서 타고난 [[조선/왕사|계승권]]이 있었다. 그런 효령대군이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한 아무리 태종이라고 해도 [[세종(조선)|충녕대군]]에게 계승을 시키는 것은 어려웠을텐데도, 어떠한 갈등도 없이 홀연히 [[충녕대군]]에게 자리를 넘겼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간의 평판이나 세속의 권력에 전혀 미련이 없는 모범적 [[재가승|재가 불제자]]의 표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썰은 실제 [[역사]]와 반대인 전혀 근거가 없는 윤색이지만, 효령대군은 나름의 정치적 판단이 있었든 아니면 정말로 스스로 권력욕이 전혀 없어서였든 간에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 셈. 심지어 아버지 태종한테 '저놈은 술 한 잔도 못 하니 부적격이다'라고 공공연한 [[디스]]를 당하면서까지 그리 했다면, 왕재는 아니었다 한들 인품만큼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동생 [[세종(조선)|세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화가 거의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특별히 우애가 틀어질 만한 사건도 없었다.[* 별 일화가 없다는건 뒤집어 말하면 큰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유유자적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큰형 양녕대군의 경우 아버지 태종은 물론 세종 치세에도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녀서 일화가 넘쳐나는 것이 그 반증.] 효령대군의 성품이 온화한 점과 세종 또한 효령대군을 정성스럽게 대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형제 관계는 양호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형 [[양녕대군]]은 효령대군을 상당히 얕잡아 본 듯한데 양녕대군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효령대군을 비난하거나, [[얼굴]]이 닮은 점을 이용하여 효령대군을 [[사칭]]하거나 효령대군이 [[불공]]을 드리는 절에서 [[사냥]]한 짐승을 조리해 먹는 등, 막 나가는[* 여기선 효령대군도 보기 거북했던지 지금 불공을 드리는 중인데 이러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양녕대군은 "부처가 있다면 네 오뉴월 [[남바위|이엄]]은 왜 못 벗기냐?(이엄은 겨울에 쓰는 방한모다. 그런데 이 방한모를 오뉴월 여름에 쓴 이유는 당시 효령이 귓병을 앓고 있어서였다. 즉 이 "이엄을 못 벗기냐"라는 말은 "네 귓병 하나도 못 치료해주는데 부처는 무슨 얼어죽을 부처!"라는 말로 부처를 모욕하는 언사였다.) 나는 [[왕형불형|살아서는 왕의 형으로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의 형으로 보리에 오를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답했는데, 이러한 형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인지 효령대군은 웃기만 했다고 한다.] 일화들이 꽤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효령대군이 형 양녕대군에게 화를 냈다는 기록조차 없으니 실로 그의 [[대인배]]스러움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불교]]를 믿어서 여러 차례 법회를 주관해 열고 절을 중건했기 때문에 불교를 [[이단]]시하는 유학자 관료들에게 자주 비판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효령대군 관련 기사는 거의 대부분 법회 주관이나 불사, 절 중건 등을 한 일로 신하들에게 까이는 것. 그러나 [[세종(조선)|세종]]이 언제나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형 효령대군을 비호하였다.[* 세종도 유학자로서 국시를 따라 불교를 억압하면 억압했지 결코 [[불교]]를 지켜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효령대군이 나서면 불교에 대한 적대감보다도 형제애가 우선이었던 [[세종(조선)|세종]]은 형을 위해 한발 물러섰고 그 덕에 조선 초기 불교계에서는 효령대군이 엄청난 [[우군]]이었다. 더구나 유학자들에게 욕은 먹을지언정 자신에게 왕권을 위협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사고뭉치 [[양녕대군|큰형]]과는 달리 비교적 점잖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했고, 자칭 [[훈구파|선]][[사림파|비]] 나부랭이들이 [[숭유억불]]을 핑계로 벌이는 지나친 반달리즘 때문에 생기는 불교계의 불만을 달래는 효과도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세종 재위기의 정정안정에 기여하게 되었다.] 살아 있을 때 [[계유정난]]이 벌어졌으나 계유정난을 지지한 형 [[양녕대군]]과는 달리 효령대군 본인은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아서 그냥저냥 넘어갔다. 그나마 당시 왕실에 관여한 것이라면 [[세조(조선)|수양대군]]과 함께 [[단종(조선)|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를 간택하는 것에 관여하거나 [[세조(조선)|세조]]가 즉위한 뒤 형 [[양녕대군]]과 함께 [[단종(조선)|단종]]에 대해 처벌할 것을 주장한 정도. 이것도 전자는 단지 왕실의 [[어른]]으로서 한 일에 가깝고 후자는 [[양녕대군]]의 행동에 묻어간 것. 이 외에는 효령대군이 정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흔적이 없다. 사실 단종 처벌도 그 시대로는 어쩔 수 없었는데, [[사육신]]의 계획이 발각되었을 때 단종의 개입이 명백히 확인되었다. 세조가 [[계유정난|왕위에 오른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어쨌건 현재 [[임금]]은 세조니 사육신은 명백한 [[반역]]자며 단종은 그 반역자들이 추대하려 한 인물이자 배후의 인물이라 가만히 놔두면 왕권에 좋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그래도 세조의 측근에게나 반대파에게나 인망이 있어서인지 세조가 [[생육신]] 6명 중 1명으로 유명한 매월당 [[김시습]]의 설법을 듣고 싶었으나 워낙 세조를 싫어하는 김시습이 가지 않으려 하는 걸 효령대군이 설득하여 가게 한 이야기가 있다. 일부에서는 불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승려가 되지는 않았다.[* 이 시기를 다룬 코믹 사극 [[영화]]인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진짜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이 된 걸로 나오는데, 걍 [[개그]] 요소.] 안 그래도 불교에 심취해서 신하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머리]]까지 깎았다가는 정말 큰일 났을 것이다. 건국 초 무학대사가 그나마 [[태조(조선)|이성계]]와 친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그나마 불교 좋아하는 걸 봐준 거지 조선은 근본적으로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조선시대의 승려는 고려시대와 달리 도성출입도 금지되었고 대놓고 양반계층에게 천시와 적대를 당하던 집단이었는데, 명목상 차순위 왕위계승권이 있는 직계 왕자가 출가를 해버리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자체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왕자가 출가를 했다면 정말 큰일이라 <조선왕조실록>에 실렸어야 하는데 당대 실록[* 특히 조선 초기 사관들은 하다못해 왕이 말을 타다 떨어졌거나 걷다가 헛발질한 것을 실록에 쓰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까지 실록에 쓴 사람들인데 이런 사관들이 왕자의 출가 사실을 안 적었을 리 없다.]에는 그런 기사가 없고 한참 후대인 [[선조(조선)|선조]]실록에나 가서야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는 구절이 있다. 선조실록에 '세자 양보설'도 같이 실려 있는데 이는 충녕대군의 왕위승계과정을 미화 윤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야사를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그냥 불교에 매우매우 심취한 거사로 지내며 불교 공부에 힘썼다 정도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향년 90세. [[태조(조선)|태조]]는 물론 조선의 최장수 군주인 [[영조]]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 영조가 81세 생을 마감했으니 효령대군은 9년 더 산 것이다 심지어 장수의 아이콘인 [[황희(조선)|황희]]랑 똑같은 나이에 죽었다. 방계라고는 하나 왕자로 태어나 평생을 왕족으로 지냈고 [[권력]]에서 일찌감치 떨어져서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산 인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평균 수명]]은 40대 중반으로, 당시 평균 연령의 2배에 가까운 기록[* 다만 여기에는 [[의학]] 발달의 부진, 높은 영아 사망률로 실질 수명보다 떨어진 것은 반영해야 한다. 즉, 영아기에 안 죽고 40대 중반까지 사는 게 아니라 영아기 때 많이 죽어서 40대 중반이 된 거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도 [[단종(조선)|단종]], [[예종(조선)|예종]], [[헌종(조선)|헌종]] 같이 비정상적으로 단명한 왕들과 [[연산군]]처럼 죽음에 대한 진실이 불명확한 왕도 있다. 이런 왕들만 빼면 보통 30 ~ 50대에 사망했고[* 8명은 50대에, 3명은 40대에, 8명은 30대에 사망했다.] 태조, [[정종(조선)|정종]], [[광해군]], 영조,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경우 예외적으로 [[환갑]]을 넘겼다.]이다. 태어난 1396년은 [[태조(조선)|할아버지]]가 즉위한 지 햇수로 5년째 되는 해이고, 죽은 1486년은 [[성종(조선)|성종]]의 25년 재위 기간 중 17년째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 전기의 왕 9명의 재위 기간을 합친 만큼 오래 살았다. 할아버지 [[태조(조선)|태조]] 5년에 태어나 큰아버지 [[정종(조선)|정종]]과 아버지 [[태종(조선)|태종]]의 즉위와 [[민무구|외]][[민무질|삼촌]]과 그 외 대소신료들에 대한 아버지의 숙청을 지켜봤고, 이후 동생인 [[세종(조선)|세종]], 첫째조카 [[문종(조선)|문종]], 종손 [[단종(조선)|단종]]의 즉위와 그 이후의 둘째조카 [[세조(조선)|수양대군]]이 벌인 [[계유정난]]을 두 눈으로 목격했으며, 이후 [[예종(조선)|예종]]과 [[성종(조선)|성종]]의 즉위와 [[세종(조선)|세종]]의 현손 [[연산군]]의 탄생까지 지켜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1년 10개월 정도만 더 살았다면 [[중종(조선)|중종]]이 태어나는 것도 볼 수 있을 뻔 했다. 그야말로 조선 초기 100년 역사의 산 [[증인]]으로, 조선 왕족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자 전 [[세계]] 왕족에서도 이처럼 90대까지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성종(조선)|성종]] 조까지 장수한 덕분에 [[성종실록]]에도 효령대군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종실의 가장 큰어른[* [[세조(조선)|세조]] 때까지는 양녕대군이 종실의 큰어른이었지만, 양녕대군이 [[1462년]]에 죽어서 이후 24년간은 효령대군이 종실의 큰어른 자리를 지켰다.]인지라[* 관계를 따져보면 성종의 큰종조할아버지다.] 매년 잔치를 베풀고 [[비단]]을 하사했다는 기록들로 보아 성종도 굉장히 그를 살핀 듯.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효령대군 몰기에는 날 좋은 날에는 [[가족]] 연회를 열면서 '''60살이 넘은 효령대군의 아들들이''' 90살이 다 되어 가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사람 [[이한]]이 지은 <몽구> 고사전에 실린 '노래지희'에서 따온 행동이다.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 사람 [[노래자]]는 칠순 [[노인]]이었는데 백세장수하는 늙은 부모 앞에서 자식으로서 기쁘게 해드리려고 색동 [[저고리]]를 입고 [[아이]]처럼 춤추면서 재롱을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관은 효령대군의 아들들의 이런 행위를 두고 성사(盛事), 즉 이 시대의 훌륭하고 장한 일이라고 기록하였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4c3463d528282.jpg|width=350]] 병에 걸렸다는 기록이 있는 등 그리 건강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도 장수한 이유는 불교식 [[웰빙]]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판에서 얻는 [[스트레스]]만큼은 적은 삶이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많다.[* 실질적으로 [[왕비]] 자리에는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던 [[단종(조선)|단종]]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도 [[중종(조선)|중종]]이 즉위할 때까지 장수했다. 이런 것을 봐도 [[궁중]] 생활에서 얻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듯하다.] 효령대군은 90세를 넘어 천수를 다 하고 [[1486년]](성종 17년) [[5월 11일]]([[음력]])에 세상을 떠났다. [[능|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부인인 [[예성부부인]]([[해주 정씨]])과 함께 예장되었고 묘소 옆에는 [[청권사]](사당)가 있다. 위치는 [[서울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이례적으로 서울특별시, 그것도 [[서울/강남|강남]] 한복판에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교통공사]]~[[뱅뱅사거리]] 구간의 [[도로]]가 [[효령로]]가 된 것도 효령대군 묘소가 있어 따온 것. 맞은편에 위치한 [[빌딩]] 이름은 프린스 효령 빌딩으로 [[2014년]] 완공된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 회관이다. 그래서 [[건물]]이 효령대군 묘소 바로 앞에 잡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