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소왕 (문단 편집) == 생애 == 효소왕은 《[[삼국사기]]》에 생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신문왕 본기> 신문왕 7년(687년) 봄 2월에 원자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효소왕이 태어나던 날 [[날씨]]가 매우 어두웠으며 [[천둥]] [[번개]]가 많이 쳤다고 한다. 692년 즉위했으니 기록대로라면 6세(만 5세) 때 즉위하여 16세(만 15세)에 죽은 것이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효소왕이 16세(만 15세)에 즉위하여 26세(만 25세)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신문왕 7년에 태어난 원자가 효소왕이 아니라 다른 왕자라고 보고 효소왕의 실제 출생연도를 677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역대 신라 [[군주]]들 중에서 최연소 즉위다.[* 효소왕에 이어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상대 최고의 정복 군주 [[진흥왕]](7세, 만 6세)이었고, 대조적으로 가장 최고령에 즉위한 군주는 [[지증왕]]으로 즉위 당시 나이가 무려 64세(만 63세)였다.] 어쨌든 효소왕은 신문왕의 태자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유년기에 즉위한 왕이 친정(親政)을 했다기보다는 모후(母后)나 신하들의 [[섭정]](攝政)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단 《삼국사기》에 그런 [[뉘앙스]]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왕권]]을 대변하는 [[중시]] 자리에 신문왕 시기 [[공신]]들이 연이어 임명된 것과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황복사 3층 석탑]]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사리함기]]를 보면 발원자가 효소왕과 신목태후(신목왕후)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신문왕 시기 공신들의 조력으로 신목왕후가 섭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51년 설치)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바꿨는데 효소왕의 [[이름]] '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철저히 지켜졌고, 현대 [[한국]]에도 일부 남아있는[* 현대에도 우리나라는 상대방을 이름보다는 직책이나 관계로 부르는 일이 많고 절친한 [[친구]]가 아닌 이상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어감상꺼리는 [[문화]]가 남아있다. 박 일병, 이 사장, 김 선생, 황 서방 등.] [[피휘]](避諱) 문화가 슬슬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좌의방부와 우의방부는 정부 [[관청]] 이름이니까 바꿨지만 이외 부분에서는 고려나 조선과 달리 피휘를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되기 전의 중간기인 효소왕 시대에는 신라 북쪽에 여전히 고구려 잔존 세력이 어떤 나라의 [[통치]]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는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693년 3월 [[국선]] 부례랑이 [[원산시|원산]] 인근에서 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효소왕 시대부터 옛 고구려 남부 [[영토]]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는데 훗날 500년 고려 [[왕조]]의 [[수도(행정구역)|수도]]가 될 [[개성시|송악]]성을 694년에 축성하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이후 훗날 [[패서]](浿西)로 불릴 지역에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695년 수도 [[경주시|서라벌]]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이미 [[지증왕]] 때 동시(東市)가 세워진 바 있으므로 이제 서라벌에는 3개의 큰 [[시장(경제)|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수도 서라벌의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후속 조치로 서시와 남시를 관리하는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도 설치하고 [[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府)의 사(史, 서기관) 2인을 증치(增置)했다. 698년 [[일본]]의 조공을 받고 699년 [[당(통일왕조)|당]]과 [[화해]]하여 오랜만에 [[조공]]을 재개했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는데 통일신라는 발해가 건국되자마자 [[고왕|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하사한다. 이는 발해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대아찬]]은 신라 골품제에서 왕족과 똑같은 [[진골]]이고, 신라가 신라인이 아닌 외부인에게 진골 대접을 해 준 건 그 외부인이 다른 나라의 왕족급일 때 뿐이었다.][* 다만 이 인정이 발해를 고구려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신라는 고구려를 신라가 흡수했다는 입장을 견지했기에, [[최치원]]의 표현을 인용하면 발해는 고구려의 '잔당'으로 간주했다. 고구려 후손이 아닌 건 아닌데 [[일부 이단]]인 셈. 그래서 발해는 신라나 당나라와 외교할 때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일본과 외교할 때만 고려라고 했다.] 통일신라가 발해보다 위라는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 두 나라는 옛날 삼국시대처럼 전쟁을 크게 벌어진 않았지만 이런 묘한 자존심 싸움은 이후 200여년간 계속된다. 어느 나라 사신이 당나라에서 더 윗자리에 앉느냐, 어느 나라 유학생이 당나라 [[빈공과]]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는가 등등.] 700년 [[이찬]] 경영이 반역을 도모하다 [[살해]]당했는데 중시였던 김순원이 여기에 연좌되어 [[파면]]당했다. 예전에는 이찬 경영의 반역 도모를, 이후 [[왕비]]를 배출하게 되는 김순원의 파문을 들어서 전제 왕권에 도전하는 [[진골]] 귀족 세력에 대항하여 일으킨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복구하고자 했던 세력과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던 세력 간의 다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김순원은 [[복권]]되었는지 이후 [[성덕왕]]과 [[효성왕]] 시대에 신라 정계에 복귀해 활동한다.] 신라와 당나라는 [[나당전쟁]] 이후 7세기 후반 동안 데면데면한 관계였던 반면 일본과는 [[교류]]가 오히려 늘었는데 이 때쯤부터 다시 일본과의 교류가 점점 줄어들고 당나라와는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때문이다. 700년 6월 어린 효소왕 대신 [[정치]]를 했을 신목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효소왕은 14세에 불과했는데 <[[신라 촌락 문서]]>에 따르면 신라에서 성인으로 여기는 나이는 15세 ~ 16세인만큼 아직 [[미성년]]일 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사망]]한 것이다. 702년에는 효소왕도 사망하는데 이 때가 16세였다. 고대 사회 기준으로도 일찍 세상을 떠난 편인데 효소왕 역시 아버지 신문왕처럼 치세 1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효소왕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므로 친동생인 김융기가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신라 하대의 [[혼란]]을 왕들의 이른 죽음에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다면 신라 중대에도 같은 혼란이 올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전왕의 이른 죽음으로 다음 왕이 지나치게 어릴 때 즉위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문왕과 효소왕에 이어 성덕왕 역시 즉위시 10대 초반이어서 신문왕 초기 [[김흠돌]]의 반역 사건이나 효소왕 시기 이찬 경영의 반역 사건과 같은 국정 혼란이 발발할 것으로 보였지만 다행히 효소왕 시대는 부왕 신문왕이 철저하게 판을 깔아두어 [[왕권]]이 가장 안정화된 시대였다. 또한 성덕왕 대에는 본인 자체가 [[명군]]이라 8세기 신라는 위기를 벗어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