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의왕후 (문단 편집) == 평가 == [[영조|시할아버지]], [[정순왕후(조선 영조)|시할머니]](정치적 부분이 있으나 대체로), [[사도세자|시아버지]](사도세자가 무척 아낀 며느리로 한중록에 자주 등장), [[혜경궁 홍씨|시어머니]], [[청선공주|시누]][[청연공주|이]], 궁관 등 주변인들의 기록이 거의 대부분 좋은 보기 드문 왕비로, 효를 정치에까지 이용한 정조와의 사이는 왕과 왕비의 지엄한 자리로서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사이라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친 아들 입장일 수 밖에 없는)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기록이 가장 눈여겨 볼 만 하다. [[한중록]]을 비롯한 혜경궁 홍씨가 남긴 기타 기록들에서는 효의왕후를 호의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전부다. 효의왕후는 경신년(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순조실록 순조 21년 8월 7일 갑신 3번째기사 효의왕후 행장, 至六月, 正宗賓天, '''后哭擗踰禮''', 夙夜不解衣, 以終三年。] 조선시대 왕비의 가장 큰 책무는 내명부 수장으로서 임무를 다 하고 왕자를 생산하는 것, 만약 생산치 못한다면 후궁의 자식을 친자식처럼 길러야 한다는 덕목이었다. 남편 정조와의 관계에서 자식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와 관련해서 궁내에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후궁(수빈)의 자식(순조)을 친자식 못지 않게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순조가 효의왕후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정조가 매우 흡족해 했다는 기록'''(순조실록 부록편 '명경왕비가 내린 행록')이 있다. 한마디로 정조와의 관계는 초반에는 정치적 지형 등으로 인해 가깝지 못했으나 점차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서로 신뢰하며 존중하는 사이''', 남녀나 부부보다는 일종의 파트너 관계로 볼 수 있다. 약방 문안 인사 문제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산실청 철수 후 다시 원래대로 복구한 것이다. (위키 효의왕후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