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의왕후 (문단 편집) == 후궁들과의 관계 == [[정조(조선)|정조]]의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 [[화빈 윤씨]], [[수빈 박씨]]는 삼간택을 거쳐 입궁한 후 빈호와 궁호를 받았다.[* [[임신]]했을 때도 [[후궁]]이 임신했을 때 설치하는 관청인 호산청이 아니라, [[왕비]]나 왕세자빈이 임신했을 때 설치하는 관청인 산실청이 설치된다. [[효종(조선)|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나 [[헌종(조선)|헌종]]의 후궁인 숙의 김씨가 [[옹주]]를 낳은 뒤에도 후궁 첩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첩지를 받은 것과 비교해보면, 다른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인즉슨 다른 왕들이야 [[왕비]]에게서 자식을 얻거나 [[궁녀]]에게 승은을 내려 후사를 이었지만, [[정조(조선)|정조]]는 왕비 효의왕후에게서 자식이 없는데다 궁녀들을 가까이 하는 왕도 아니었기 때문. 이 때문에 정조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이 다 되어 가도록 자식이 없었고, 할머니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명문가 규수 중에서 후궁을 간택하게 된 것. 첫 번째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와의 사이는 좋지 못했던 것 같다. 애초에 좋을 수가 없었다.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은 고작 13세 정도의 어린 아이였고, 삼간택에 응해 있을 당시 박재원이 이에 반발하여 효의왕후의 난임을 치료하자고 건의하니 홍국영은 공석에서 박재원에게 욕을 한 일이 있었고, 이 일 때문에 효의왕후가 [[원빈 홍씨]]를 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다는 기록이 실록에 많다. 엄연히 정궁인 왕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궁하여 '으뜸 원' 자를 빈호로 받았다. 원빈을 맞아들이는 예도 명나라 황귀비의 예에 준하는 성대한 예식이었다고 한다. [[홍국영]]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는 [[원빈 홍씨]]의 입궐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빈이 입궐하여 효의왕후를 만나려 하자, 효의왕후는 유월의 더위를 핑계로 회피한다. 대비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는 효의왕후에 대한 원빈 홍씨의 인사가 늦어지자 입궐한 돈녕부인(홍낙춘의 처)을 설득한다. 왕(정조)은 첩을 들이는 심정과 같고, 효의왕후는 역시 인사 받기를 미루다가 마지못해 납폐례를 받고, 대비전과 [[혜경궁]]에게 예를 드린 후 입궐 의식이 끝난다. 혜경궁은 며느리 효의왕후의 편인 듯한 인상을 준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9240&cid=46641&categoryId=46641|#]] 어쩐지 남편과 시어머니의 묵인으로 왕비가 신입 후궁을 길들이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원빈 홍씨]]가 입궁한 지 1년도 안 되어 죽자 2번째로 간택한 간택 후궁 [[화빈 윤씨]]와의 사이는 기록된 바 없지만, [[이재난고]]의 내용을 보아 자신을 심하게 질투하는 후궁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을 것 같다. [[정조(조선)|정조]]의 세번째 [[후궁]]이자 정조가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승은후궁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고 한다.[* [[정조(조선)|정조]]가 손수 쓴 어제의빈묘표과 [[어제의빈묘지명]]에 의하면, [[의빈 성씨]]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한 효의왕후를 많이 배려해 준 것으로 인해 사이가 각별해진 것으로 보인다.] 효의왕후와 [[의빈 성씨]]는 [[1753년]](계유년) 동갑내기인데다, 입궁 시기도 10살 때인 [[1762년]](임오년)으로 같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처음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을 때,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가 아직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또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앞으로는 효의왕후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어제의빈묘표에 따르면 의빈이 죽은 날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정조(조선)|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인 [[수빈 박씨]] 역시 효의왕후 등 윗전을 공경하였다고 한다. 1821년 심한 복통으로 전혀 식사를 못하고 심하게 앓다가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아마 [[맹장염]]으로 추정된다. 효의왕후, [[화빈 윤씨]], [[수빈 박씨]] 이 세 여인은 정조 사후에도 약 20년을 더 살았고, 약 60세 정도에 1년 ~ 2년 간격으로 효의왕후, 수빈, 화빈 순으로 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