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의왕후 (문단 편집) == 여담 == * 《순조실록》에는 3차례의 간택을 거쳐 별궁으로 들어갔으나 그때 마마를 앓았다고 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wa_12108007_003|#]], 《[[한중록]]》에는 2번째 간택 일을 지낸 다음 마마를 앓았다고 되어 있다. * [[1775년]](영조 51년), 정후겸, 홍인한, [[화완옹주]]는 [[정조(조선)|왕세손]]의 [[대리청정]]을 극렬히 반대했다. [[1776년]](영조 52년) 2월 28일 왕세손([[정조(조선)|정조]])은 왕세손빈(효의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시묵에 대해, "김시묵은 반드시 화완에게 청하여 홍인한을 정승이 되게 하려고 하였고, 홍인한은 또 정후겸에게 비밀히 부탁하여 김시묵을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게 하려고 하였다. 김시묵이 또 일찍이 나에게, 홍인한이 그 형보다 나으니 정승을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34A_0020_020_0020&solrQ=opSecId%E2%80%A0BD$query%E2%80%A0%ED%99%94%EC%99%84%EC%97%90%EA%B2%8C%20%EC%B2%AD%ED%95%98%EC%97%AC$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2$solr_curPos%E2%80%A01$solr_solrId%E2%80%A0BD_ITKC_BT_1434A_0020_020_0020|#]] * [[1792년]](정조16년) [[2월 17일]], 정조는 승지를 보내어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 [[1792년]](정조 16년) [[9월 11일]], 정조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제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청원부원군 및 의춘 부부인과 당성부부인은 바로 내전(內殿)의 고비(考妣)이다. 봉역(封域)이 눈에 들어오는데 어찌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 내일 치제하게 하고, 제문은 지제교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 [[1793년]](정조 17년) [[12월 27일]], 정조는 예관을 보내서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사당에 내일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제22권에 당성부부인 치제문이 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84A_0220_010_0150&solrQ=query%E2%80%A0%EB%8B%B9%EC%84%B1%EB%B6%80%EB%B6%80%EC%9D%B8$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1$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GS_ITKC_BT_0584A_0220_010_0150|#]] * 《[[조선왕조실록]]》 정조 대왕 천릉 지문이나 효의왕후의 행장에도 효의왕후의 [[상상임신]]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87년]], 중년에 효의왕후가 갑자기 [[임신]]한 것 같자 정조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산실청을 설치하였으나 1년이 지나도록 혈육을 두지 못하였다. *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가 완성된 다음 날 효의왕후가 묘에 임하고 환궁했다. [[1789년]](정조 13년) [[4월 26일]], "진시(辰時)에 내전(內殿)이 묘에 임하였다. 예를 마치고 환궁(還宮)하였다." * 천성이 덕스럽고 인자했으며 검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적에는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 [[풀]]을 뽑고 있는 것을 말릴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고 전해진다. 효심도 깊어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시누이인 [[청연공주|청연군주]], [[청선공주|청선군주]][* 왕세자의 [[적녀]]를 군주, [[서녀]]를 현주라고 한다. 아버지인 왕세자가 즉위하면 [[공주]] / [[옹주]]로 승격된다.]와도 우애가 대단했다. 심지어 남편의 [[후궁]]이자 세자까지 낳은 [[의빈 성씨]]와도 동기간처럼 잘 지내다 의빈 성씨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극히 슬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조카 집착증이 있던 시고모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정조(조선)|정조]]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고 온갖 이간질을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정조와 한동안 서먹한 관계를 보내기도 했다.] 꿋꿋이 버텼으며 화완옹주에게 예를 갖췄다고 한다. 사실 [[품계]]로만 따지자면 왕세손빈 시절부터 이미 [[옹주]]보다 높았음에도[* --조금 애매한게 사실 옹주는 품계가 없기는 하다.-- 옹주는 외명부의 무품계이고 왕세손빈은 내명부의 무품계이다. 내명부가 외명부보다 위에 있으니 왕세자빈과 왕세손빈이 옹주보다 존귀한 신분이다.] 남편의 고모를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혜경궁 홍씨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약]] 시중과 [[반찬]]의 [[맛]] 보는 일을 했다고 한다. 검소하고 공과 사의 구별이 분명하여 [[수진궁]]과 [[어의궁]]에서 남은 [[음식]]이 있더라도 "궁중의 재물은 공물이니 사가의 어버이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다. 효의왕후는 성품으로 트집잡힐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 시대 이상적인 [[여성]]상에 맞추어 보통은 남편 [[정조(조선)|정조]]를 조용히 내조하였으나 [[정치]]적으로 나선 일이 1번 있었는데 정조가 총애한 [[신하]]인 [[홍국영]]과 대립한 일이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조선)|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바로 [[원빈 홍씨]]였다. 홍국영은 여동생이 [[왕자]]를 낳아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홍국영은 정조랑 친하게 지내며 당시 정조랑 효의왕후 사이가 그닥 좋지 않다는걸 알고 있었을테니 이를 이용해 원빈 홍씨를 잘만하면 [[중전]]급으로 올릴 수 있겠다는('으뜸 원'부터가 후궁이 쓸 [[칭호]]가 아니다) 생각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얼마 못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만 것.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여 효의왕후를 모함했고 함부로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국왕]]의 허가 없이 중궁전의 궁녀를 문초하는 사실상 [[하극상]]을 저지른 것. 이에 정조가 효의왕후의 편을 들어주면서 정조가 총애하던 당대 실권자 홍국영은 그렇게 정계를 은퇴하고 만다. * [[임신]]하여 1787년(정조 11년) 9월 18일 산실청을 설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109018_001|#]] 정조는 6년 전에 후궁 [[화빈 윤씨]]가 임신하자마자 미리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30여 개월을 [[출산]]에 이르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해산 달에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고 결국 1788년(정조 12년) 12월 30일 산실청을 철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212030_002|#]] 산실청이 1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어디에도 출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임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상임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효의왕후의 상상임신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정조대왕 [[천릉]] 지문이나 효의왕후의 [[행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결국 화빈 윤씨처럼 효의왕후도 상상임신이었는데 화빈 윤씨와 다른 점은 화빈 윤씨의 경우는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데 반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임신이었고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 엄연히 법적 아들인 순조가 21년동안 재위할때까지 왕대비로서도 꽤 오래 있었지만 정작 대중적으로 왕대비로서의 존재감이 적고, 순조 시대 사극에서도 순조 재위 5년만에 승하한 정순왕후와 달리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