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종(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효종 2년([[1651년|1651]]) [[음력|음]][[1월 27일]] [[청나라]]가 진주사(陳奏使)[*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파견되는 임시 비정규 사절 또는 사신을 말한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4899|#]]]의 [[표문]][* 황제에게 올리는 외교문서.]에 적힌 [[乾]][[淸]][[坤]][[夷]][* 건청곤이, 하늘은 맑고 땅은 골라졌다.]라는 구절을 가지고 청이(淸夷, 청나라 오랑캐)라 비꼬았다고 문제 삼자[* 문제의 핵심인 夷가 '평평하다' 란 뜻과 '오랑캐' 라는 뜻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동이의 이도 이 글자니 특히나 청나라는 이민족 출신이라 더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측에서 [[오랑캐]]가 아닌 평평하다라는 뜻이라고 이를 해명하느라[* 정작 청나라는 그럼 건청곤녕([[乾]][[淸]][[坤]][[寧]])이라고 해야 했다며 다시 따졌고 이에 [[조선]]측은 우연이라 했다가 나중엔 결국 잘못 썼다고 말했다.] 애먹은 일이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스토리가 그려졌다.] >'''효종께서는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아직도 저승전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정조실록 28권에 서술된 [[사도세자]]의 무예.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756604B58976E6B10.jpg|width=100%]]}}} || || {{{#ffd400 ''' 효종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월도와 철퇴.'''}}} || * 체구가 크고 힘이 강하여 승하한 후 미리 제작한 관의 크기가 어깨와 맞지 않아 널빤지를 이어붙여 관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정무가 끝나면 말을 타고 월도나 철퇴를 들고 무예를 닦았는데 무기들이 매우 육중하여 영조 시기에 효종이 사용한 월도와 철퇴를 힘이 강하다는 무관들이 다루었는데 모두 못 다루었다. 무기가 무겁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들어올리는 정도는 무관들도 할 수 있었겠지만 무게를 못 이겨 능숙히 다루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효종은 기골이 장대한 왕이라 체중도 보통 사람들보다 많이 나갔을 것이고 다른 사람보다 무거운 무기를 잘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체중이 가벼운 사람이 무거운 무기를 억지로 휘두르면 역으로 무기에 휘둘려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 그렇게 누구도 다루지 못한 효종의 무기를 사도세자가 16세에 갑옷을 입고 무리없이 다룬 것이다. *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는데 야사에 따르면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나르시시즘]]에 빠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조]]의 아버지이자 효종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원종(조선)|원종]]도 당시에 외모가 뛰어났다는데 초상화를 보면 미묘하다.[* 과거에는 현대와는 달리 수염이 길고, 후덕하고 육중한 체구를 부와 미 또는 [[건강]]의 상징으로 보았으며 특히 [[남자]]라면 건장한 체구 자체가 하나의 미덕으로 칭송받는 경향이 있었다. 효종은 무예 연마에 힘쓴 왕이었으니 활력이나 [[근육]]도 발달했을터. 지금으로 분류하자면 짐승남 같은 [[터프가이]]형 미남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외모를 떠나 조상인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부터 거의 [[먼치킨]] 무인인데다가 아들인 [[정종(조선)|정종]]도 (사극에서 이미지는 유약하지만) 체구가 건장한 무골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문종(조선)|문종]] 역시 체구가 크고 [[수염]]이 길었으며 세조도 초상화를 보다시피 후덕하고 듬직한 외모이다. 이를 볼 때 대부분의 조선 왕가의 남자들은 왕실 대대로 기골이 장대했던 것일 수도 있다. 예외로 [[연산군]]은 사냥을 즐긴 무골기질이 있었으나 좀 호리호리했다고 한다.] * 효종에게는 '팔장사(八壯士)'라는 8명의 호위 무관이 있었는데 이들은 박배원, 신진익[* 후에 무과에 급제.], 오효성[* 효종 재위 10년 중 대부분을 별군직 행수로 일했다.], 조양[* 효종 2년 칠원 현감에 제수되었다.], 장애성, 김지웅, 장사민, 박기성 이렇게 8명이다. 이들은 효종이 [[왕자]] 시절 청나라에 끌려갔을 때부터 효종을 호위했고 귀국 후 효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가까이에서 효종을 보필하였다. 일명 '용만 팔장사'라고 하는데 용만(龍灣)은 [[평안북도]] [[의주군|의주]] 일원의 지명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갈 때 이 곳에서 호위대를 선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군직 신설을 두고 대소신료들 사이에선 "임금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사를 처리한다"며 볼맨소리 또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재위 내내 이들 팔장사만큼은 각별하게 챙겼다. 뭔가 이름이 [[야사]]나 민담에나 나올법한 이름들이지만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 이름을 찾을 수 있다. '팔장사'라는 표현은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효종실록》과 《현종실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대가 아니라 후대의 일이며 기록이나 전승에 따라 8명이 아닌 경우도 있고 간혹 이름도 다르다.[* 나중에 덕천 군수를 지낸 김여로 등이 포함되기도 하는 등 전승하는 인원을 모두 합치면 이미 여덟 명이 넘는다. 초기 별군직이었던 인물들이 뒤섞여 전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효종은 즉위 후 별군직을 신설해 자신의 가까이에 뒀고 주로 왕의 가벼운 행차나 습사 등에 동행했으며 평시에는 왕의 침소를 은밀 경호했다. 다만 이들이 봉록으로 받는 결수가 같은 급의 다른 관리들보다 높아 당대에도 여러 번 논의가 이뤄졌었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별군직청을 신설코자 했으나 대신들의 견제가 있어 효종 7년에야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별군직청 자체는 이후 시대에도 유지되다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절에 폐지됐다.] * 상기한 용만팔장사 중 오효성이라는 사람과는 야사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남겼다. 효종이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4세였던 아들 [[현종(조선)|현종]]을 교자에 태울 수 없어서 팔장사가 번갈아가며 어린 현종을 등에 업고 걸었는데 어린 현종은 다른 장사들이 안으면 계속 울었지만 오효성이 안으면 얌전해져서 [[선양시|심양]]에서 [[서울특별시|한성]]에 도착할 때까지 결국 오효성이 현종을 계속 업고 걸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기가 물거나 침을 하도 흘리는 바람에 어깨에 상처가 생기고 옷의 등이 많이 닳아 버렸다. 뒷날 효종은 팔장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오효성은 현종을 업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 효종이 오효성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취기가 오른 효종이 오효성을 총애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팔을 잡고 이야기하려 하자 오효성은 이를 사양했다. 그러자 빈정 상한 효종은 갑자기 [[거문고]]를 들어서 오효성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쳐 버렸으며 당연히 오효성은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결국 다음 날 술에서 깬 효종은 이 사실을 알고 오효성에게 크게 사과하면서 더욱 총애했다는 야담이 남아 있다. * 한편,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효종이 [[왕세자|세자]]가 된 이후 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의 출처는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 정확한 출처는 《청장관전서》 제57권 〈양엽기〉 4의 '팔장사'편.]인데 이덕무는 여기서 "오효성의 후손이 기록한 것에서 뽑아 기록해 둔 거임"이라고 언급해 두고 있어서 야사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세조(조선)|수양대군]]의 경우에는 술을 좋아했고 술자리 정치까지 했던 양반이니까 [[신숙주]]가 취해서 왕이 시키는대로 팔을 꺾어버렸다는 야사가 남아도 신빙성이라도 있는데 정통성 [[콤플렉스]]로 거의 구도자 수준의 생활을 유지한 효종이 술에 취해서 거문고로 신하를 두들겨 팼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크게는 천하와 국가를 잃고 작게는 필부(弼夫)의 일신(一身)을 망치는 것이 술에서 생기는 일이 많은데 관직에 임(臨)한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술로 인해 말을 실수하는 데에서도 화(禍)를 자초하기에 이르기 일쑤이니 이보다 더 심한 해로움이 어디 있겠는가.''' >---- >효종실록의 효종대왕 행장. *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조선의 왕들 중에서도 술은 자제한 왕. 조선의 음주 문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효종이 조선의 관리들이 즐기는 음주 문화를 비판한 것이지만 현대의 음주 문화에도 살펴볼 바가 많은 말이다. 실제로 효종은 관리들에게 술을 줄이라는 교지를 내렸고 1658년에는 아예 [[금주령]]을 내렸다. * 볼모 시절부터 아낀 [[신하]] 중 하나로 [[장현(조선)|장현]]이 있다. 장현은 본래 [[역관]]으로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수행하면서 역관 신분을 이용해 청나라의 정보를 모으고 화약 및 무기를 몰래 반입하는 위험한 일을 자발적으로 행했다. 효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고 [[1657년]](효종 8년)에 장현을 정2품 자헌대부로 올려줄 정도로 총애했다. 장현에게는 이후 [[궁녀]]로 입궁한 5촌 조카딸이 있는데 바로 [[희빈 장씨]]다. * 효종이 [[심양]] 생활을 할 때 입었던 [[마고자]]가 있었는데 [[1900년]] [[경복궁 선원전]]에서 [[화재]]가 나는 바람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 가정 생활에서는 상당히 다정한 아버지면서도 [[인선왕후|아내]]에게 쥐여 사는 [[애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효종은 정실 왕비인 [[인선왕후]] 장씨에게서 훗날의 [[현종(조선)|현종]]인 [[세자]]를 얻고[* 얼마나 아꼈는지 당시 세자는 허리를 숙여서 땅바닥에 책을 놓고 수업을 받았다(스승은 존경하라는 의미). 그런데 효종은 세자 허리 나갈까 봐 꼼수까지 써가며(핑계인즉슨 "세자의 수업에 쓰이는 교재는 《[[논어]]》로 [[공자]]님 말씀을 적어놓은 책인데 어찌하여 바닥에 두고 하는가?"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수업하려 했다가 실패했다.] [[공주]]들도 여러 명 낳았는데 [[후궁]]에게서 낳은 아이는 [[안빈 이씨]] 소생의 [[숙녕옹주(효종)|숙녕옹주]]가 유일했다. 효종은 어느 날 세자와 공주들을 불러서 [[선물]]을 주었는데 숙녕옹주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정실 인선왕후의 [[눈치]]를 보며 선뜻 주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선왕후는 나중에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따로 주었는데 [[부부]]가 둘 다 마음이 좋았던 것 같다. 이 때부터 조선 [[왕실]]에서 전반적으로 아들 보기가 힘들어지는데[* 당장 효종 사후 [[왕위]]에 오른 현종도 아들이 숙종말고는 없었다.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이후의 세대에서는 대군이 전혀 없다. 적자손이 있어도 다들 그냥 원자손이나 세자 또는 세손 [[테크]]를 타지 대군에 봉해지기도 전에 [[요절]]해버린다. 효종이 조선 [[국왕]]들 중 마지막으로 대군 출신으로 즉위한 왕이다. 앞선 사례는 정안대군(태종)-충녕대군(세종)-수양대군(세조)-해양대군(예종)-자을산군(성종)-진성대군(중종)-경원대군(명종)이고 봉림대군(효종)이 마지막이다. 태종은 왕자시절에는 대군이라는 명칭이 본인 재위기간에 제정된 탓에 그냥 정안군으로 불렸지만 태조의 적자이므로 대군 출신 왕이라는 정의에 부합한다.] 기껏 태어나도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철종(조선)|철종]]의 승하로 인해 '''효종의 남계 [[후손]]은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단절되었다'''.[* 실제로는 철종의 승하 이후에도 철종의 이복 형인 [[영평군(1828)|영평군 이경응]], [[은언군]]의 증손자이자 [[익평군]]의 친자 [[경은군|경은군 이재성]] 이렇게 2명이 있었다. 하지만 영평군은 실제 후손을 남기지 못해 혈통 단절, 경은군이 2남을 낳기는 했는데 그 이후의 알려진 후손이 없다. 경은군 아들들의 후손이 없을 경우 정말 효종의 실제 남계 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만 두 딸 [[숙안공주]]와 [[숙명공주]] 등 여계 후손들은 존재한다.] * >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이 [[고양이|괴양이]]는 품고 있느냐?[* "너 시집 갔으면 시가에 정성을 다해야지, [[고양이]]만 품고 있으면 어쩌니?"라는 의미다. 여담으로 효종의 손자이자 [[숙명공주]]의 조카인 [[숙종(조선)|숙종]]도 애묘가였다.]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 > - 효종이 딸 [[숙명공주]]에게 쓴 언문([[한글]]) 편지.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AKR20121210195551005_01_i_59_20121211150314.jpg|width=100%]]}}} || || {{{#ffd400 ''' 《숙명신한첩》에 수록된 효종의 편지 '''}}} || 이 편지는 [[숙명공주]]가 친정(왕실)의 어른들과 주고받은 서찰을 모은 《[[신한첩|숙명신한첩]]》([[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629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숙명공주가 입궁 시기 때 [[궁]]에 못 온 적이 있었는데 효종은 [[숙명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못 왔느냐? 네 언니와 여동생들이 좋은거 다 들고 가서 네 것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게 진작에 오지. 부를 때 못 온 건 아무리 봐도 네 남편 때문이니까 남편이랑 열심히 싸우고 남편 신나게 갈궈라."라는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 여기에는 공주의 부모인 효종 내외 뿐만 아니라 남동생인 [[현종(조선)|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내외, 양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당대 [[왕족]] 등의 고위층 생활상과 왕실 [[가족]]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사료(역사)|사료]]이기도 하거니와 한글 [[서예]] 쪽에서도 조선 초의 [[판본체]]에서 조선 후기의 [[궁체]]로 변해가는 과도기의 자료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효종의 [[왕비]]이자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도 편지를 보냈는데 인선왕후는 "[[숙휘공주|네 여동생]]은 벌써 [[임신]]해서 아기 베개에 수 놓는다고 수선 떨고 있는데 너는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식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편지들이나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효종의 가족들은 왕실 가족답지 않게 인간적이고 훈훈한 가족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게 특징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능인 [[닛코 동조궁]]에는 효종이 어필로 보낸 영산법계숭효정원(靈山法界崇孝淨院) 이라는 편액이 있다. 1655년 6차 [[조선 통신사]]가 동조궁을 참배할때 우호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다.[[https://blog.naver.com/parkks_2000/222084395688|#]],[[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21/08/758704/|#]] * 효종을 시작으로 조선 왕실은 남자 자손이 귀해진다. 효종 1명, 현종 1명, 숙종 3명, 경종 없음, 영조 2명 식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숙종도 자식을 얻은 아들은 영조 하나 뿐이고, 영조도 자식을 얻은 왕자는 사도세자 하나뿐이라는 것. 즉 '''효종부터 사도세자까지 죄다 실질적인 독자 가문이다.''' 달리 보면 사도세자는 사실상 4대 독자인 셈. 다행히 사도세자는 4명의 아들을 얻었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생긴다. 숙종의 다른 아들들인 연령군은 어려서 죽고, 경종은 그냥 안 생겨서 없었다. 영조의 다른 아들인 효장세자도 어려서 죽은 것이라지만, 사도세자의 아들들은 정조, 은언군 정도만 자식을 남겼다. 정조 가계는 순조-효명세자-헌종까지 사실상 독자로 이어지다가[* 정조와 순조는 아들이 1명 더 있었지만 어려서 죽었다.] 단절되었고, 은언군 가계도 은언군을 시작으로 정치싸움에 많이 얽어져서 풍파가 많았다. 은언군은 진작에 정치싸움에 휘말려 유배갔고, 상계군도 비슷하게 역모사건에 이름이 올랐다가 급사했다. 풍계군은 자식 없이 죽었고, 전계대원군만 살아남았는데 전계대원군의 세 아들도 이원경은 역모사건에 이름이 올라서 죽었고, 이경응은 장수했지만 자식이 없었으며 철종도 사실상 자식이 없었다.[* 철종의 자식들도 대부분 작호를 받기 전에 죽었다.] 나머지 두 아들인 은신군, 은전군은 각기 정치싸움과 역모에 휘말려서 죽었다. 더 가관인건 이런 상황에서도 역모에 이름이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왕족들이 죽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이런 이유로 죽는 것만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아들들 중에서 은전군은 목숨을 건졌을 것이고, 보험(?) 하나는 생겼을 것이다. 아니면 이원경이 살아서 이원경이 먼저 왕이 되었을 수도 있고. 어느쪽이든 효종의 가계가 끊어지는 일은 없거나 최소한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이 지경이니 결국 철종까지 죽자 효종의 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상술했듯이 풍계군의 친아들 경은군이 있기는 했지만, 철종 사후 왕위를 이을 상황이 아니었으며 결국 경은군의 대도 끊어졌다.) 애초에 아들이 적은데 그 아들들마저도 정치투쟁, 역모사건으로 날려버려 결국 왕가의 대까지 끊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셈. 철종 다음 왕인 고종도 명목상으로는 효종의 후손이지만 그건 족보상이고[* 족보상으로 고종은 숙종의 아들인 연령군의 후손(정확히는 연령군의 양손자로 입적된 은신군의 아들로 입적)이었다가 효명세자의 아들로 옮겨졌다. 그래도 고종의 경우는 남연군 대부터 연령군 후손이긴 했다.] 혈연상으로는 이미 인조 대에서 갈라진[* 철종은 생물학적으로 효종의 후손이지만 고종은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