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종(조선) (문단 편집) === 즉위 과정 === [[광해군]] 11년([[1619년|1619]])에 [[인조|능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어머니는 [[인열왕후]] 한씨, 새어머니는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 비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 장씨였다. [[인조]] 4년([[1626년|1626]]), 8살에 '''봉림대군'''(鳳林大君)[* 봉호는 [[황해도]] [[봉산군]]에서 유래했다. '효종'이란 [[묘호]]도 물론이지만 봉호인 '봉림대군'이란 칭호 또한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때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인질)로 잡혀 끌려간다. 볼모로 [[심양]]에 있는 동안 청나라가 [[산해관]]과 서역을 대대적으로 치려고 할 때 소현세자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자신이 형인 세자를 대신하고 자처해 가겠다고 할 정도로 당시 세자 신분이었던 형을 성심성의껏 지키려고 했다. 인조 23년([[1645년|1645]]) 5월, 귀국했는데 그로부터 1개월 뒤 소현세자가 죽는 바람에 그의 뒤를 이어 [[세자]]에 책봉되었고, 인조 27년([[1649년|1649]])에 아버지 인조가 [[죽음|승하]]하자 다음날 [[창덕궁]] [[창덕궁 인정문|인정문]] 앞에서 즉위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김자점]]을 비롯한 친청파는 온 조정의 맹렬한 [[탄핵]]을 받았다. 효종은 김자점과 [[이시백]] 두 사람을 잘 예우하라는 인조의 유언 때문에 김자점에게 벌을 주지는 않았지만 온 조정이 등을 돌린 김자점은 조정에서 신망을 잃고 완전히 실각하고 말았다. 김자점이 병자호란 때 한 짓[* 당시 [[인조]]가 발 빠른 청군 기동대에 쫓겨 [[남한산성]]에서 힘겹게 항거하고 있는 동안, 도원수 김자점은 인조의 명령("[[김자점|신]]은 [[평안도]]에서 침입하는 청군을 막으라")대로 [[평안도]]에 틀어박혀 막으려 했지만 의외로 청군이 여러 평안도 성들을 지나쳐 [[압록강]]을 건넌지 10일도 안돼 [[한성부]] 부근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자 패닉 상태에 빠져 지원군을 보내기는커녕 청군을 피해 숨어서 술잔치에 여자를 끼고 놀았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물론 김자점이 정말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었다. 이러한 논리는 개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가장 큰 근거를 제공한 《병자록》은 김경징에 대한 잘못된 묘사 등 오류가 있는 기록으로 청나라 측 기록 및《승정원일기》에서는 김자점이 특별히 태업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되어 있다. 이후의 행적도 김자점의 책임과 조정의 책임이 반반인데 김자점은 군사적 안목과 능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아서 청군 선발대, 그것도 300명 밖에 되지 않는 소부대에만 집중해 본대가 들어오는걸 못 막았으며 그나마 이때는 이겼지만 1,000명의 선발부대와의 전투에서는 졌다.[* 그러고 한동안 인조가 근왕을 지시할 때까지는 정방산성에 머물렀는데 사실 한국 역사에서 산성에 짱박혀 농성하는 것은 북방에서 내려오는 대규모 외적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기에 김자점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토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이겼기에 아주 무능까지는 아니었지만 토산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더는 남한산성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양평에서 농성해야 했다. 조정의 대책은 이후의 김자점의 행동에 악영향을 준 수였는데 서북쪽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온 도원수 김자점 외에 심기원이라는 또다른 인물을 남도 구원군을 지휘하는 도원수로 임명했던 것이다. 김자점도 도원수다 보니 지휘권자가 2명이라는 막장 상황에 이르렀다. 안 그래도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그나마 걸어볼 기대가 남도 구원군의 도착이었는데 이쪽도 김자점처럼 상처뿐인 승리만 거둬서 김자점 못지않게 주변에 주둔하며 농성만 하는 중이었고, 그 남도 구원군의 지휘관도 도원수인데다가 김자점과 심기원이 의견 충돌을 빚어서[* 김자점은 즉시 남한산성으로 가서 구원할 것을, 심기원은 신중론을 펼쳤다.] 시간만 소모했고 겨우 상황을 정리하니 김자점도 신중해졌다.[* 김자점이 쥔 군대는 조선이 통솔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군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남한산성으로 진격했으나 30리를 남겨두고 인조가 항복했다. 이에 김자점의 아들들이 격노했고 친청파 무장들과 대신들을 끌어들여 아버지와 함께 [[역모]]를 계획하나 [[소용 조씨]]의 행패를 [[자의대비]] 조씨[* [[인조]]의 계비, 효종의 새어머니. 훗날 [[장렬왕후|장렬왕후 조씨]].]가 조사하던 중에 발각되어 처형--(사지절단형)--당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 친청파는 자취를 감추고 반청(反淸), [[북벌론]]의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뒤에 말한 것처럼 실제로 과연 이들이 '''[[북벌]](北伐)을 정말로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며 효종도 북벌론을 그리 공공연하게 주창하지 않았다.''' 천하의 [[청나라]]가, 천고일제라고 불리는 성조 [[강희제]] 치하에서 크나큰 위세를 떨치며 버티고 있는데 즉위하자마자 북벌 운동을 공공연히 추진하면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할 지 모를 정도로 효종이 멍청하지 않다. 군대를 재건하고 성을 다시 쌓은 것은 사실이지만 청군의 침공에 대비한 준비였기 때문에 청나라도 대놓고 트집잡지는 못했다. 효종은 대놓고 [[청나라]]에 거슬리기보다는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고 [[서양]] 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하는 등 망가진 조선의 시스템을 정비하고 기강과 기초적 군사력을 다듬는 일에 주력했다.[* 이 《시헌력》이 바로 오늘날 [[한국]]에서 쓰이는 [[음력]]이다.] 게다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는 소리와는 달리 효종은 청나라의 문물[*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유산을 청나라가 계승한 것에 가깝다. 물론 중원 입관 전에도 청나라의 [[만주족]]은 마냥 야만족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웠다. 애초에 [[금나라]]가 급하게 세워진 나라인 것과 달리 청나라는 충분한 준비를 거쳐 기틀을 다진 나라다.]을 매우 고평가해서[* 사실 효종에게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없었고를 떠나서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청나라 문물(특히 군사 제도)에 대한 관심(및 선호)은 애초부터 결코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감으로써 '''싫은 건 싫은 거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지극히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 구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면서 청나라 문물은 잘도 받아 들이네? 되게 이중적이네?"라는 반응이야말로 단선적이고 편협한 사고 방식의 발로다. 복수도 어쨌든 힘이 있어야 하고 [[지피지기|복수할 상대가 어떻게 강한지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꾸리고 운영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좋은 것은 내 것으로 만들어 써먹을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신하들에게 [[오랑캐]]의 문물을 숭상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혹자는 [[소현세자]]가 즉위했다면 조선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데 현실적으로 당시는 산업혁명기 이전이라 소현세자가 즉위했다고 해도 효종과 별반 다른 결과를 빚기 어려웠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