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종(조선) (문단 편집) === 정통성에 대한 태도 === 소현세자의 일로 정통성을 공격받은 효종은 정통성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면 몸서리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군비를 확충하고 신인 무반들을 새롭게 발탁하면서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는 강단을 보이면서도 개인적인 면모는 성직자와 유사하다는 후대의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정갈하고 모범생이던 효종. 그런 효종이 [[민회빈 강씨]]와 조카들은 물론 이들을 추숭하자는 신하들에게 지나치게 단호한 모습을 보인 것은 취약한 정통성 때문이다. 그렇게 강빈은 정통성 문제로 효종의 치세에는 대놓고 역적으로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효종이 형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악감정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는데 소현세자와 효종이 왕자이던 인조 치세에는 전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즉위한 후 강빈을 역적으로 몰면서도 조카들은 보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조카딸 중 한 명이 청나라에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될 처지에 놓이자 바로 막아서 보호하였고 [[경안군]]의 유배를 풀어서 궁궐에 복귀하도록 도와준다. 효종이 강빈의 억울함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모양이 되므로 억지를 부려서라도 강빈을 비하하고 강빈을 옹호하는 신하에게도 엄중한 처벌을 내린다. 하지만 효종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에도 비판이 강하였다. 강빈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모든 신하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효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불안정하고 효종이 항상 정통성을 역린으로 여긴 사실을 알려준다. 정치에서 정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효종의 정통성 문제는 사후에도 이어져 현종의 치세에 [[예송논쟁]]으로 발전하여 일이 더욱 커진다. 10년에 불과한 효종의 치세에는 정통성과 관련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데 영의정을 지낸 윤방이 [[1640년]]에 사망하자 윤방의 아들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중종(조선)|중종]] 시대의 권신인 [[이행]]의 후손인 [[이식(조선)|이식]]에게 요청하여 시호를 청하는 글인 시장을 받는다. 그런데 [[심기원]]의 옥사와 소현세자의 사망을 비롯한 대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시장을 올릴 시기를 놓치고 그 사이에 이식은 사망한다. 어느 정도 시국이 안정을 찾고 다시 시장을 올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문장이 좋아도 시장을 고인의 이름으로 올릴 수 없어서 대신 조익에게 요청한다. 조익은 이식의 문장이 워낙 좋으니 고칠 내용이 없다며 일부 구절만 고쳐서 지었는데 하필이면 '역강'이라 표현할 부분을 '강빈'이라 표현한다. 효종의 분노를 산 조익은 1651년에 삭탈관직당한다. 그 해에 [[김자점]]의 옥사가 발생한 후 저주 행위로 무당인 앵무가 처형되고 사헌부에서 "같은 죄를 저지른 신생이라는 자는 왜 살아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효종은 "왜 신생을 가지고 이 난리인가?"라고 반응하였다. 사헌부에서 신생을 언급한 이유는 신생은 강빈의 옥사 당시 강빈을 배반한 인물이기 때문인데 신생은 강빈이 사망하고 1년 후에 강빈이 묻은 저주물을 수색하는 도중 저주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렇게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유배되고 효종이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생을 처벌한다는 것은 효종이 왕이 될 명분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후로 효종은 얼마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역강을 옹호하는 자는 역적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빈을 신원한 왕은 효종의 손자인 [[숙종(조선)|숙종]]인데 인조나 효종을 탓하지 않고 [[소용 조씨]]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식으로 일을 정리하였다. 그럼에도 정통성 문제는 가라앉지 않았다. [[1654년]]에 효종은 [[재이론]]에 기반하여 재변이 일어나는 경우 신하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비판을 듣는 '구언의 명'을 내린다. 왕이 비판을 들을 줄 알아야 재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언의 명을 통해서 나온 상소는 왕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은 있어도 비판하는 상소를 이유로 처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성종(조선)|성종]] 시대에 성종이 구언의 명을 내리자 문절과 백영변이 [[폐비 윤씨]]를 살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데 윤씨를 혐오하던 성종은 상소를 받고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구언의 명을 내리고 올라온 상소이므로 죄를 물을 수 없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이러한 구언의 명의 특성을 감안하여 황해감사 김홍욱이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다. 강빈이 묻은 저주물의 발굴 위치와 시점이 맞지 않고 강빈이 전복구이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후원에 단단히 감금된 강빈이 저지를 수 없는 일이며 소현세자의 자녀들의 사망에도 의혹이 많다는 것이 근거. 결론은 강빈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벌어진 재변이니 강빈을 신원하자는 것이다. 김홍욱의 상소에 분노한 효종이 김홍욱을 국문하게 되는데 김홍욱은 효종이 구언의 명에 응하여 상소를 올린 것인데 분노하며 자신을 국문하자 심기가 나빠진다. 효종과 같이 국문에 참석한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왜 말을 하지 않는가?"라고 타박하고 대사헌에게는 "언로를 막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를 들어본 적 있는가?"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분노한 효종이 국문을 멈추지 않자 체념한 김홍욱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뽑아 도성 문에 걸어두어라.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겠노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김홍욱이 효종의 국문에 의해 사망하자 신하들은 대놓고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김홍욱의 사망은 효종의 가장 큰 실책으로 기록된다. 신하들의 반발도 더욱 잦아졌는데 김홍욱이 사망하고 원로 대신인 정두령이 "김홍욱이 죽은 이후 모두들 두려워하며 크게 의혹하여 언로가 끊기려 하니 이는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 아니옵니까."라는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다음 해부터는 김홍욱의 후손에게도 죄가 미치게 한 건 가혹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시간이 더 흐르고도 "김홍욱을 역적으로 벌한 건 온 나라 사람들이 지나치다고 하옵니다. 전하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인심을 잃은 적이 없는데 김홍욱의 일만은 모두가 원통하다고 하옵니다."라는 상소와 간언이 끊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효종도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김홍욱을 국문한 일을 실수라고 인정하면서 김홍욱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하를 처벌하지 않았고 5년 후에 김홍욱을 신원한다. 왕이 구언의 명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효종이 강빈을 옹호하는 자는 역적라고 강조한 이상 강빈을 언급한 것은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린 행위가 맞다. 하지만 효종이 강빈의 옹호를 금지하는 명을 내릴 당시 김홍욱은 외지에 머물러서 효종의 명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였다. 실제로 김홍욱은 국문을 당하면서 강빈을 언급한 부분은 자신의 실수라고 인정하고 외지에 나가서 왕의 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신하들도 김홍욱이 죄를 지었지만 고의로 효종을 능멸하려고 올린 상소는 아니니 적당하게 처벌하고 방면하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분노를 못 이긴 효종이 김홍욱에게 가한 국문을 멈추지 않아서 사망하게 만들고 후손들도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명령하면서 논란을 키운다. 김홍욱도 허물도 있으니 적당히 국문하고 귀양을 보내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면 논란도 없었을 터인데 효종이 너무 감정적으로 김홍욱을 국문한 것이다. 효종의 스승이자 신하인 [[송시열]]은 효종에게 "전하께서 한 때의 분노로 대뜸 김홍욱을 때려 죽임으로서 인심을 크게 잃었사옵니다."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의 상소를 받은 효종은 송시열의 뜻에 따라서 김홍욱의 후손들에게 내린 금고령을 해제하면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효종의 감정적인 행동은 소문이 무성하게 퍼진 계기가 되었고 스스로도 승하하기 전까지 김홍욱이 원통한 죽음을 당한 것이라는 상소에 시달린다. 효종실록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김홍욱의 원통한 죽음은 효종이 승하한 1659년이다. 말년의 효종은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김홍욱의 후손들에게 금고령을 해제하면서 신하들에게 찬사를 듣는데 2개월 후에 승하한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행동으로 정치적인 악수를 둔 것인데 효종이 욱하는 기질이 다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질을 나쁜 형태로 표현한 사례. 이렇게나 정통성에 민감한 효종이지만 승하한 후에도 효종의 정통성을 두고 첨예한 대립이 발생한다. 왕조 시대에 아버지인 인조가 장자 국유론을 내세워서 비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받은 효종이므로 그에게 정통성은 치명적인 약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