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신라/후삼국시대|신라]]의 지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말여초(927).png|width=100%]]}}} || || '''{{{#fbe673 927년 한반도의 판도 }}}''' || 8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지방 세력가들이 딴살림을 차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세력을 키워 이내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했지만 경주의 신라 중앙정부는 한동안 이들을 지방 반란세력으로 간주할 뿐 신라와 대등한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 수백년간 한반도를 지배한 정통 왕조로서 역사성은 신라의 가장 큰 경쟁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율희]], [[능문]], [[왕봉규]] 등 전국 각지의 여러 작은 호족들은 비록 반독립적 자율성을 가지고 간을 보고 있었지만 일단은 신라 중앙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성하는 친신라적 입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920년 고려와의 국교 수립은 여태껏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지방 반란세력으로 간주하던 기존 30여년간의 신라 정부의 입장을 버리고, 처음으로 고려를 신라와 대등한 하나의 나라로 인정한 일대의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기록에 명시돼 있진 않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이 때 신라는 고려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경명왕]]의 실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왔는데, 이 판단으로 신라는 한반도를 다스리던 정통 왕조라는 명목상의 지위까지 포기하고 후삼국 셋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상징성을 크게 잃어버렸다는 것. 게다가 고려군의 지원을 받는 모습은 더 이상 신라 중앙정부가 작은 호족 세력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실제로 경명왕 이후로 본격적으로 작은 호족들이 신라를 버리고 고려에 투항하는 사례가 급증한다. 신라-고려 수교 직후 920년 2월 [[강주]] 장군 [[윤웅]]이 고려에 항복했고, 922년에는 [[안동시|하지성]] 장군 [[원봉]], [[명주]] 장군 [[왕순식|순식]], [[청송군|진보성]] 장군 [[홍술]]이, 923년에는 [[포천군|명지성]] 장군 [[성달]]과 [[성주군|경산부]] 장군 [[양문]]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 왕실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 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앞서도 언급되었기도 하지만, 신라를 수백 년 동안 백제, 고구려, 당에게서 지켜주던 충북 남부-경북 서남부 추풍령 방어막이 통째로 후백제에게 넘어가버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존심만 내세우며 지원이 가능한 고려의 존재를 외면해버렸다면, 결국 초래될 결과는 후백제에 의한 서라벌 초토화 뿐이었다. 그보다 오백 년 전 신라 또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부족해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불러들였던 건 결코 아니었다. 경명왕이 자존심만 내세우고 고려마저 계속 반란분자 취급하며 무시했다면, 앞서 거명되었던 호족들은 후백제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후백제에게 넘어갔거나, 아예 견훤에게 군사력으로 병탄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경명왕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만만치 않았지만, 대백제 전선에서 신라가 너무나도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라의 '도통' 즉 신라의 명실상부한 '''정규군 대장군''' 내지는 신라의 '''권력자''' 노릇을 하고 싶었던 신라 군인 출신 반란자 견훤을 아예 정식 백제왕인 신라대왕의 제후왕으로 인정해서 다독이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이건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다. 그나마 왕건은 끝까지 서라벌 일대의 자치를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인정해주었으나, '''서라벌 자체를 손 안에서 흔들어대는 권력자 노릇을 절실히 하고 싶었던 견훤은 결코 그럴 인간이 아니었으며''' 그 일은 나중에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 경애왕 제거 후 견훤이 보인 신라 왕실 및 서라벌의 저항역량 무력화 작업이 그 바쁜 시기에도 꽤나 체계적이고 냉철하였다. 견훤이 서라벌에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일찍부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며, 최소한의 사리분별이 있는 말기 신라왕이라면 이런 견훤을 동맹이나 제후왕으로 삼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렇게 경명왕 시절 신라가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났긴 했어도, 신라의 명목상 종주국 위치는 한동안 여전했다. 견훤이나 왕건 역시 비록 칭왕했으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대외적으로 완전한 독립국을 자칭한 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나마 신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던 것. 이것은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견훤과 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다'라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으로나마 상위에 있는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으며, [[경애왕]]을 비명에 가게 한 견훤은 [[왕망]]이나 [[동탁]][* 둘 다 신하로서 천자를 살해한 자들이다.]에 비유해 비판하고 있다.[* 춘추 시대의 [[서주]]와 비슷한 형태.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왕의 장인 등 가까운 친족에게 '[[갈문왕]]' 칭호를 내렸던 것도 외왕내제적 체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의 전문 연구자 중 하나인 신호철 교수는 후백제의 견훤이 반신라적이었다고 기술하는 개설서나 교과서의 내용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미 이전 시대인 [[삼국시대]]에도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고구려는 전성기에 신라를 속국으로 삼기도 했고 마한이나 가야의 소국들을 비롯한 작은 나라들이 삼국에 종속된 형태로 존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궁예는 이 범주에서 빠진다. 궁예는 신라에 극도로 적대적이었고, 적어도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대외 교섭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견훤은 경애왕을 시해했을 때도 충분히 신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나 고려군이 몰려오는 판에 서라벌(경주)에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고 한편으로는 정통성 확보라는 다른 큰 명분을 확보해야 했던 차였기에 일단은 경애왕의 이종사촌이자 김씨인 경순왕을 즉위시킨 후 완산주로 떠났다. 아무래도 실제로 고려가 그랬듯이 신라 조정의 정식 항복 같은 방식을 거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군주에게 칼을 겨눈 역적이라는 인식을 만들어서 역으로 고려에게 명분이 돌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적어도 신라에 동정적인 전국의 호족들이 후백제 대신 고려에 붙을 명분은 충분했던 것. 당시 적어도 옛 백제 지역 외의 통일신라 지역 호족들은 강주의 [[왕봉규]]나 김해의 [[소율희]]같이, 신라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하기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 역사성과 정통성을 고려해서 적당히 협조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927년 견훤의 잔혹한 서라벌 침공은 이들 입장에서 가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호족들이 난폭한 견훤 대신 유화적인 왕건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위와 같이 견훤과 왕건은 신라 조정을 서로 명목상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러한 묘한 관계가 무너진 것은 고창 전투에서 견훤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무게추가 기울어 버린 이후다. 930년의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지 1년 만인 931년 초에 신라가 고려에 국서를 보내 '순'(順)하면서 신라왕이 정식으로 고려왕의 신하가 되어 상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다. 이로써 '''형식적인 '존왕의 의'는 완전히 부정'''되었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왕건이 '''신라왕의 상전인 고려대왕''' 자격으로 경주를 방문한다. 왕건의 방문은 서라벌을 위무하고 경상도 일대 호족들에게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이미 체결된 상하관계 확인 및 확고한 복종의사 확인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 당시 서라벌에서 왕건과 김부가 서로를 대등한 국왕으로 대우하는 의식이 성대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931년에 물론 경순왕이 국서를 보내 칭신하긴 했어도 그걸 서라벌인들이 보는 가시적 형태로 확인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 사실 936년에 신라가 정식으로 고려에게 귀부하고 후백제가 멸망하긴 했지만, 931년의 이 신라의 칭신이 당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선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전까진 후당을 비롯한 오대십국과 일본 등이, 고려가 신라의 신하국이니 '급'이 맞지 않는다며 사신 접견을 거부하거나, 접견하더라도 책봉을 거부하는 사태가 왕왕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931년부터 거짓말 같이 줄줄이 고려는 대외적으로 '고려왕'으로 인정받으면서 정식 책봉을 받았고, 이로써 신하국으로 전락한 신라는 완전히 국제사회에서 없는 나라처럼 취급되었으며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외교전 또한 고려의 승리로 결판나게 된다. 이후 왕건의 고려 정부와 신라 사이에 오간 국서에서 경순왕이 왕건을 대왕이라 일컬으며 고려에서 온 사신을 대등 혹은 보다 우위에 있는 국가의 사자로 대우한 반면, 왕건 자신은 이에 대해서 전혀 이의없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면서 신라왕과 고려왕 사이의 서열이 완전 정리된 게 또 다시 확인된다. 신라왕이 사실상 고려대왕의 신하로 떨어진 이 관계는, 왕건보다 약 오백 년 전 앞선 시대에 고려왕들이었던 광개토대왕-장수왕 등이 내물, 실성, 눌지 마립간 등과 맺었던 바로 그 관계의 재현이었다. 그나마 눌지마립간은 무력을 통한 실력 행사로 장수왕과의 관계를 군신간이 아닌 형제간으로 재조정하고 이후 진흥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대한 반격에 성공해 상황을 뒤집었으나, 모든 가능성을 잃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버린 경순왕은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신라-고려의 관계를 중국 삼국 시대의 한-위로 보면서 경순왕을 헌제로 보는 시각이 간혹 나타나는데, 이는 크게 틀린 생각이다. 헌제는 직접 지배 영역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데다, 위(魏)는 한(漢)의 승상직을 세습하는 조씨 가문의 봉국이었지 한과 관계가 대등한 이웃나라가 아니었다. 즉 어디까지나 한 제국의 강역에 속해 있는 봉건국이었다. 한편 귀부 당시 경순왕의 신라는 비록 고려를 상국으로 섬기는 속국이었을망정 엄연히 별도로 존재하는 이웃 나라였다. 이러한 상황은, 굳이 비유하자면 현대 한국인에겐 다소 생소한 전국시대 말기의 [[동주]]나, 대놓고 [[오스만 제국]]의 신하로 떨어진 14세기부터의 [[동로마 제국]]이 더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