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시미노미야 (문단 편집) == 성립 == 14세기 중후반, 일본 [[남북조시대(일본)|난보쿠초 시대]]에 황가가 분열하여 남조(南朝)의 '''다이코쿠지토'''(大覚寺統)와 북조(北朝)의 '''지묘인토'''(持明院統)가 경쟁한 적이 있었다. 이때 지묘인토의 정통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으로 등극하지 못한[*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요시히토(榮仁) 친왕이 창설한 궁가가 시초였다. 궁가의 명칭은 영지였던 [[교토]]의 후시미(伏見)에서 따왔다. 그런데 3대 사다후사(貞成) 친왕 때 그의 큰아들 히코히토(彦仁) 친왕이 제102대 [[고하나조노 덴노]]로 즉위하면서 전기를 맞게 되었다. 사다후사 친왕의 차남이었던 사다츠네(貞常) 친왕이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었을 때, 그의 형인 고하나조노 덴노가 대대로 [[신적강하]] 없이 황족의 자격으로 세습할 수 있는 칙허를 후시미노미야에 내리면서 궁가의 지위가 천황이 소속된 직궁가(直宮家)에 버금갈 정도로 상승하게 되었다. 실제로 19대 당주였던 사다유키(貞敬) 친왕은 천황의 직궁가가 단절되는 바람에 유력한 차기 [[천황]]으로 꼽힌 적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구《[[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이전까지는 지금처럼 황위 계승 서열이 철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춰서 후계 천황을 정할 수 있었다. 이때 후시미노미야와 [[간인노미야]]가 경합한 끝에 현 황실의 직계 조상인 간인노미야에서 즉위하여 지금의 황실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사이에 가끔 자신들의 딸을 [[도쿠가와]] 쇼군가에 시집보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