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시미노미야 (문단 편집) == 부흥 및 방계 궁가 == 19대 사다유키(貞敬) 친왕대부터 자식을 엄청나게 낳아대기 시작했다. 다만 사다유키의 자식들은 많았지만, 구니이에(邦家) 친왕이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고, 9남(실제는 10남)이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훗날 구니이에 친왕의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아사히코의 4남이었던 모리마사가 계승을 하며(참고로 모리마사는 계승 이후 바꾼 이름이었다.), [[영친왕]]의 처가이자 [[이방자]] 비의 친정이 된다.]를 창설한 일 이외에 나머지 자식들은 요절하거나 출가했기 때문에 황족의 규모가 그렇게까지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대 '''구니이에'''(邦家) 친왕은 확인된 자식만 '''33명'''이었고, 그 중 아들이 '''17명'''이나 되었다. 구 《황실전범》의 제정으로 영세황족주의가 도입되자 황실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불어난 황실을 유지하는데 돈이 들다보니 궁가를 잇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왕자들은 [[화족]]으로 신적강하시켰다. 게다가 메이지 시대에 이렇게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창설을 허용한 사정도 있는 것이 당시 직계 황족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당장에 [[메이지 덴노]] 본인부터 동생이 요절하고 위로도 장성한 아들이 1명밖에 없는 상황에, 그나마 가깝던 간인노미야가 단절되고, [[다이쇼 덴노]]가 태어나기 이전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승계 순위 1위이던 시절이 장기간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그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후시미가 당주는 그저 먼 황족이 아니라 '''계승순위 3위'''인 황족이었다. 1947에 [[신적강하]]한 [[구황족]] 11궁가 가운데 9궁가가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 및 손자들이 창설한 것이었다. 어차피 그 전부터 있었던 나머지 두 궁가의 당주도 구니이에 친왕의 자손이었다.[* 4친왕가의 하나인 [[간인노미야]]와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를 말한다. '''간인노미야'''는 구니이에 친왕의 16남인 易宮(다카노미야/야스노미야)가 봉사손으로 입적하면서 고토히토(載仁)라는 이름으로 친왕선하를 받아 6대 당주가 되었으며, '''나시모토노미야'''는 구니이에 친왕의 손자인 모리마사(守正)가 계승했다.] 따라서 소위 '''"구황족"'''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구니이에 친왕의 후손이다. 또한 [[고준 황후]]가 후시미노미야 방계 후손이었으므로 [[아키히토|아키히토 덴노]]의 직궁가하고도 혈연 관계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