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시미노미야 (문단 편집) == 1947년 신적강하와 그 이후 == 북조 3대 [[스코 덴노]]의 적장남 요시히토(栄仁)가 개창한 세습친왕가의 하나였다. 이후 [[쇼코 덴노]]가 딸 하나만 남기고 죽자 3대 당주 사다후사(貞成)의 아들 중 적장자인 히코히토(彦仁)는 [[고하나조노 덴노]]가 되었고, 차남인 사다츠네(貞常)는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었다. 후시미계 궁가 10가문 가운데 종가(宗家)로 [[황적이탈]] 당시 당주 히로아키(博明)와 그의 모친[* [[히로히토]] 황태자의 황태자비 간택 당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함께 탈락한 [[후지와라]] [[고셋케]]의 이치조 도키코(一条朝子). 후에 히로아키의 부친 히로요시(博義)의 비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살 차이라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히로아키와 이구는 전후 동반 [[미국]] [[유학]]을 떠났고, 이치조 도키코와 [[이방자]] 여사·[[영친왕]]은 항구에서 함께 배웅했다.], 누이 2명이 강하했다. 현재는 당주인 히로아키가 딸만 3명이나 두어 장기적으로 '''남계(男系)로서는 단절될 예정'''이다. 표면상으로는 황적이탈이 자발적으로 이탈했다지만, [[미국]]의 압박 등으로 이뤄진 신적강하였기에,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현재의 황실과 [[구황족]]과의 교류를 위한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가 만들어져 주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파일:external/blogs.c.yimg.jp/img_1?1324173825.jpg|width=1000]] 사진은 1994년 초 [[아키히토|아키히토 덴노]]의 [[환갑]] 및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축하행사를 겸해서 열렸을 때의 모습이다. 참석 멤버들은 천황 부부를 비롯한 황족 및 후시미계 구황족, 그리고 시집간 공주와 사위 및 그의 자손, 그리고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였다. 그리고 황후의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이구(1931)|이구]]이다.[* 외가쪽으로 따지면 후시미 궁가 계통이고, 아키히토 덴노와 6촌 형제이다.] 역사적인 연원도 있는데다가 현재의 황족 가운데 후계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구황족 부활 등으로 일부[* 주로 극우 세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후시미 궁가는 또 하나의 황실'이라는 내용으로 책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모든 구황족 궁가들이 후시미노미야의 분가이지만 정작 종가인 후시미노미야는 현 당주인 히로아키가 딸 셋만 두었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 단절 확정이다. 게다가 구황족들이 신적강하 이후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 [[이혼]], [[불륜]], [[성매매]], [[야쿠자]] 연계 등등] 등으로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이들을 다시 황족으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구황족 각 궁가의 당주들에게 황적 복귀 의사를 물은 적이 있지만 한 명도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사실 히로아키를 비롯한 이들 당주들은 아직도 주위에서 '[[전하(호칭)|전하]](殿下)'로 불리며 황족 대접을 받고 있기는 하다.] 그만큼 그들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는 않다. 2022년 후시미노미야의 현 당주인 히로아키가 자서전을 내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는 것과 동시에 그가 한 다단계 회사의 홍보모델로 활동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의혹에 대해서 본인은 성질을 내면서 인터뷰를 회피했다고 한다. 해당 보도에 대해서 그동안 구황족 복귀를 부정적으로 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황족 복귀에 대해서 여러가지 사유로 중립적으로 보던 사람들 속에서는 구황족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마저도 논란이 생긴 것에 대해서 놀라워하고 있는 상태이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 version=110)] [[분류:세습친왕가]][[분류:구 미야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