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장(동음이의어) (문단 편집) == 厚葬(장례) == 후하게 장례를 치른다는 표현. 연맹왕국 시대의 [[부여]], [[고구려]]의 풍습이다. 후하게 장례를 치러 내세를 도모하기 위하여 서너달간 시체가 썩지 않도록 얼음도 가져다가 오랫동안 장례를 치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고고학]]/[[역사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의 고분 문화 전반을 대표하는 여러 특징 중의 하나를 후장이라고 하며, 위의 [[역사학]]에서 용어보다는 포괄적으로 사용한다. 한국과 유사한 장례문화를 영유하였던 [[일본]]의 경우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아예 [[고훈 시대|고분시대]]라고 표현하는데, 시대를 대표하는 개념으로써 '고분'이라는 것을 설정한 것은 바로 해당 시기의 사람들이 고분을 축조하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무덤]]을 만듦으로써 무덤에 묻히는 사람의 위세, 그리고 그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 가족들의 위엄을 현세에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형의 왕릉들은 단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이후로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그것에 비해서 현격하게 규모가 작아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 속에서 장례를 함에 있어 많은 금공품과 장식품, 다량의 부장품을 매납함으로써 위신을 뽐냈고 이러한 현상을 후장이라고 표현한다. [[순장]]도 사람을 일종의 부장품으로 보는 것으로 후장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후장의 풍습은 위처럼 내세사상에 기반한 현상으로써 한반도 기준 5~6세기를 거치면서 [[불교]]라는 사상이 국가적 종교로 자리잡기 시작함과 동시에 기존의 내세사상을 불교적인 사상이 대체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굳이 무덤을 크고 화려한 부장품들을 묻을 필요성이 사라진 것으로 이 시점의 고분문화, 장례문화는 간소해지는데, 이 시점에는 반의어로써 굳이 직역하면 박하게 장례를 치룬다는 의미로 박장(薄葬)이라고 표현한다.[* 후장이 흔하던 시절에도 박장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조]]. 박장을 하던 이들 중에선 후장을 했다가 도굴당할걸 염려해서 박장을 하던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여러 곳에 가짜 장례를 치르게 해서 도굴꾼이 무덤 위치를 가늠하지 못하게 꼼수부리던 지배자도 있었다고.] 명칭이야 다르지만 많은 값진 부장품을 후하게 묻어 장례를 치른다는 부분에서 유사한 풍습은 아시아권 뿐만이 아니라 서구권 쪽에서도 존재했다. 그리고 후장의 풍습으로 장례를 치른 이들의 무덤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도굴]]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인능욕을 물론 문화유산 훼손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학자들 중에서도 도굴을 자행한 이들이 실제로 있었다.] 또한 단순히 무덤에 뭘 많이 넣는 것은 물론, 무덤 그 자체에도 엄청나게 공을 쏟아 대규모로 만드는게 후장에 따라오게 되자 무덤을 만드는데도 필연적으로 인력과 돈이 많이 들어가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만력제]]의 명십삼릉이 대표적.[* 만력제는 통치시기에 낭비를 크게 일삼았는데 이 무덤 만드는데 돈 퍼붓던 것이 그 대표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