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즈키야 (문단 편집) ==== 반론 ==== 단,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위 링크의 논문에서도 나오듯, 그 당시 세계의 열강이었던 이집트나 아시리아나 히타이트 등 고대 근동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본인들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축소시켜서 적어두거나 심지어 승리로 바꿔놓기까지 했다. 이는 고대 사본학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아시리아 측에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바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애초에 저렇게 18만 5천명의 대군이 전염병으로 죽었을 정도라면 과연 센나헤립이 무사할지가 의문이었으며, 그렇게 대패를 당하고 살아 돌아왔다 셈쳐도 왕위를 길게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센나헤립의 재위기간은 기원전 705~681년으로 총 24년이었다. 남유다 침공은 재위 4년차인 기원전 701년.] 하지만 현실은 센나헤립은 유다 침공 이후로도 반란 진압과 원정도 여러번 했으며, 니네베를 중건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훗날 후계자 분쟁에 휘말려 두 아들에게 살해당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을 하나 더하자면 센나헤립이 살해당하고 에사르핫돈이 차기 왕이 된 시점은 '''히즈키야 사후였다.'''[* 히즈키야는 기원전 687년에 병사했고, 센나헤립이 살해당한 년도는 기원전 681년이다.] 구약에서는 히즈키야 파트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지만 실제로 그게 발생한 시기는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 시기였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