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한국의 수도)] [include(틀:고려의 행정구역)] [목차] [clearfix] == 개요 == 1232년부터 1270년([[고종(고려)|고종]] 19년 ~ [[원종(고려)|원종]] 11년)까지 [[여몽전쟁]] 중 38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옛날 이름. 별칭으로 강경(江京), 강화경(江華京)이 있다. [[강화도 천도]]이후,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에는 [[황도]](皇都)[* [[최항]] 묘지명 중 기록. 원래는 [[개경]]을 의미.]로 불렸던, [[임시수도]]가 아닌 엄연한 정식 수도였다. '''[[강화도]]의 최정점 시대,''' == 역사 == 원래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소속인 강화현(江華縣)이었다. [[천도]] 후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으로 승격되었고, [[고려궁지|본궐]]이 세워졌다. 강화로의 천도는 [[무신정권]]기 대몽항전에서 [[몽골제국군]]의 침공을 피하고자 [[최씨정권]]의 집권자 [[최우]]의 독단으로 갑작스럽게 결정되어 궁궐지나 성의 조성없이 이루어져 전국의 백성들을 징발해서 성과 [[고려궁지|궁궐]]을 [[공밀레|쌓게 되었는데 불과 2년만에 완성되었으며]] 수도 [[개경]]의 모든 거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강도에는 주로 개경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근처의 [[남경]]([[서울]])과 [[광주시|광주]]([[경기도]] 광주)에서 합입한 백성들이 거주했다. 하지만 [[한반도]] 본토를 유린하고 강화도 정부에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한 [[몽골 제국]]에 굴복해 [[개경]]으로의 [[환도]]와 더불어 내성과 외성, 궁궐 대부분을 허물면서 양광도 [[인주]] 소속으로 들어가 강화현이 되었고 그 후 [[강화부]]가 되었다. 이후 [[왜구]]와 [[병자호란]], [[병인양요]]에 의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개발살]]나 버렸다. == 기타 == [[고려왕릉]]도 당시 죄다 유골을 여기로 옮겼기도 하며, [[고종(고려)]]의 [[강화고려홍릉|홍릉]] 등 일부 [[왕릉(무덤)|왕릉]]은 아직도 강화도에 남아있다.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전쟁통 혼란기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해도 가 보면 굉장히 초라하다. 이 시기 강도에는 각종 제방이 설치되어 대규모로 [[둔전제]]가 이루어지고 각도의 산물이 모여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크고 아름다운]] 고려의 대도시였다고 추정된다. 조선 초 [[한양]] 인구 20만의 절반이며, '''심지어 현재 [[강화군]]의 인구보다도 많다!''' [[강화도]]가 다른 섬보다 넓은 편임을 감안해도 1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먹여살릴 정도로 생산성이 있지는 않으므로 강도시대 [[둔전]]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간척]]도 많이 이루어져 이 시기에 여러 지역의 [[만]]이 농지로 바뀌었다. 강화도 위성지도를 보면 해안가 지역에서 이 시대 이전에 바다였던 부분을 구별할 수 있다. == 관련 글 == * [[고려왕조]] * [[대몽항쟁]] * [[강화도]] * [[강화군/역사]] * [[개경]]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강도, version=162)] [[분류:고려]][[분류:한국의 옛 수도]][[분류:강화군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