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강태하}}}'''[br]'''姜太河'''}}}}}}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강태하(제주 독립운동가).jpg|width=100%]]}}} || || '''창씨명''' ||노다 타이카(農田太河) || || '''이명''' ||강정봉(姜丁奉) || || '''본관''' ||[[진주 강씨]] || ||<|2> '''출생''' ||[[1897년]] [[4월 5일]] || ||[[전라남도]] [[대정군]] 좌면 하원리[br](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인근의 회수동·상예동과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 || '''사망''' ||[[1967년]] [[8월 8일]] (향년 70세) || || '''추서'''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7년 4월 5일 [[전라남도]] [[대정군]] 좌면 하원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좌면 하원리에서 법정사 주지 [[김연일]]을 중심으로 한 법정사 승려들 및 인근 주민 다수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6개월여 전부터 조직적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화승총]]이나 곤봉 등 무기를 조달하는 등 무장항쟁을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일본인 관리나 상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목적을 격문으로 알렸다. [[강창규(독립운동가)|강창규]]의 지휘 아래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고 중문리의 경찰관주재소를 불태우며 일본인을 구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강태하는 당일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9372|이종창]](李宗昌) 등이 하원리로 들어와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자 양봉(梁鳳) 등과 함께 거사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6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강태하는 거사 당일 바로 붙잡히지는 않았고, 1달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11월 2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튿날인 27일 동지들과 함께 기소되었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엔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4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6682&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 형벌에는 벌금 30엔을 완납할 수 없을 때는 30일간 노역장에 유치한다는 부속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강태하는 이에 따라 30일간 노역장에 유치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7년]] [[8월 8일]] 별세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강태하(독립운동가), version=7)]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서귀포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강씨]][[분류:1897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