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비]][[분류:거창 신씨]][[분류:1476년 출생]][[분류:1537년 사망]] [include(틀:역대 조선 왕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거창군부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연산군의 왕비[br]{{{+1 거창군부인 | 居昌郡夫人}}}'''}}}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연산군20100529-6.jpg|width=100%]]}}} || ||<-2> {{{#ffd400 {{{-2 연산군묘 전경}}} }}} || || '''출생''' ||[[1476년]] [[12월 24일]]^^([[음력]] [[11월 29일]])^^ || ||<|2> '''사망''' ||[[1537년]] [[5월 26일]]^^([[음력]] [[4월 8일]])^^[br]{{{-1 (향년 60세)}}} || ||[[조선]] [[한성부]] 거창군부인 사저 || ||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 || ||<|4>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빈}}}''' || ||[[1488년]] [[2월 17일]] ~ [[1495년]] [[2월 3일]] || ||'''{{{#ffd400 조선 왕비}}}''' || ||[[1495년]] [[2월 3일]] ~ [[1506년]] [[9월 28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본관''' ||[[거창 신씨]] || || '''부모''' ||부친 거창부원군 [[신승선]] (居昌府院君 愼承善, {{{-3 1436 ~ 1502}}}) 모친 [[중모현주]] [[전주 이씨]][* [[세종(조선)|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딸이다.] (中牟縣主 全州 李氏, {{{-3 1435 ~ ?}}}) || || '''형제자매''' ||{{{#!folding 3남 5녀 중 4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신수근]]((愼守勤, {{{-3 1450년 ~ 1506년}}}) 오빠 - [[거창 신씨|신수겸]]((愼守謙, {{{-3 1453년 ~ 1506년}}}) 오빠 - [[거창 신씨|신수영]]((愼守英, {{{-3 1461년 ~ 1506년}}}) 언니 - [[전주 이씨|이형]](李泂)의 처({{{-3 1466년 ~ ?}}}) 언니 - [[의령 남씨|남경]](南憬)의 처({{{-3 1467년 ~ ?}}}) 언니 - [[순흥 안씨|안환]](安煥)의 처({{{-3 1469년 ~ ?}}}) 여동생 - 유윤범(柳潤範)의 처}}} || || '''배우자''' ||[[연산군]] || || '''자녀''' ||'''4남 3녀 {{{#gray (8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휘신공주]] 이수억(徽愼公主, {{{-3 1491 ~ 1524 }}}) 차녀 - 공주({{{-3 1492년 또는 1493년}}}) {{{-3 요절}}} 장남 - 원자({{{-3 1494 ~ 1494}}}) {{{-3 요절}}} 3녀 - 공주({{{-3 1495 ~ ?}}}) {{{-3 요절}}}[*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 차남 - [[폐세자 이고]](廢世子 李𩔇, {{{-3 1498 ~ 1506}}}) 3남 - [[창녕대군]] (昌寧大君, {{{-3 1500 ~ 1506}}}) 4남 - 이인수(李仁壽, {{{-3 1501 ~ 1503}}}) 여덟째 - ({{{-3 1502 ~ ?}}}) [* 부친 신승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유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봉작'''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 || '''존호'''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 || || '''별호''' ||폐비 신씨(廢妃 愼氏)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제10대 [[조선/왕사|국왕]] [[연산군]]의 [[왕비|정비]]. [[연산군]]의 정실로 [[영의정]] [[신승선]]의 딸로 4녀(일곱째)이며 [[좌의정]] [[신수근]]의 누이이다. [[중종(조선)|중종]]의 비 [[단경왕후]]에게는 고모이자 손위 동서가 된다.[* 조선에서는 [[근친혼]]이 터부시되었지만 겹사돈에는 관대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세종대왕|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외손녀이기도 하다.[[http://cafe447.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64lj&fldid=GDbf&contentval=0000izzzzzzzzzzzzzzzzzzzzzzzzz&nenc=5YaY_DWSfwIgRrb5LfE_TQ00&fenc=WWHYJ5pJ2Lk0?docid=164lj%7CGDbf%7C63%7C20100322172232&q=%BD%C5%C1%F6%BB%F3&nil_profile=cafetop&nil_menu=sch_updw|#]][* 계산해보면 [[연산군]] 쪽이 [[칠촌|7촌]] 조카가 되는 관계. [[세종대왕]]이 [[연산군]]에게 고조부가 되고, 처 신씨 입장에서는 외증조부. 그리고 시할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외당숙이기도 했다. 다만 나이는 거꾸로 되어서 [[연산군]]이 생일이 20일 정도 빠른 [[동갑]]이다. [[칠촌]] 관계이면 현재 민법으로는 혼인할 수 없는 관계지만 [[조선시대]]에는 [[동성동본]] 혼인만 기피했을 뿐이지 성씨와 본관만 다르면 육촌, 칠촌 사이의 [[결혼|혼인]]은 매우 흔하게 이루어졌다.] == 생애 == [[1487년]](성종 18년) 3월, [[성종(조선)|성종]]에 의해 [[세자빈]]으로 정식 내정되었으며 11세가 되는 다음해인 [[1488년]](성종 19년) [[1월 26일]], 동갑내기인 [[연산군]]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된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빈례를 거행하고 [[세자빈|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간택 없이 책봉된 첫 사례이다. [[갑자사화]] 당일 남편 [[연산군]]이 시아버지 [[성종(조선)|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려 죽이고 장검을 뽑아든 채 [[정현왕후|자순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자, 신씨는 이를 뒤쫓아가 남편 [[연산군]]을 극구 말리면서 [[자순대비]]를 구원하였고 의붓며느리 덕분에 다행히 [[정현왕후|자순대비]]는 안도할 수 있었다. [[1502년]](연산군 8년),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의 [[연산군일기]] 기록을 보면, "신씨는 [[만삭]]이라 친상 중이지만 [[고기]]를 못 먹게 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아예 거애(곡하는 것)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만삭]]인 만큼 유산하거나 신씨의 건강이 상하는 것을 우려해서였던 것 같다.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805029_003|#]]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가는 처지의 남편 [[연산군]]을 모시기 위해 자신도 그와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대신 [[거창 신씨|친정]]이 있는 사저로 보내졌다.[* 여담으로, 나중에 폐위된 [[광해군]]의 경우 아내 [[문성군부인]] 류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남편 [[연산군]]이 죽고 난 후 그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으로 추정되며, 시동생인 [[중종(조선)|중종]]에게 [[강화도]]에 묻혀있던 [[연산군]] 시신을 양주 해촌으로 이장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중종(조선)|중종]]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때 [[조선/왕사|왕]]이자 이복형이었던 [[연산군]]의 시신을 거두어 양주 해촌에 이장하게 했다. 다만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매우 비참한 말로를 겪었고 전부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8명의 자식들 중 4명은 아기 때 죽었고 1명은 유산되었다. 남은 3명 중 폐세자 이고와 창녕대군은 왕자라는 이유로 살해되었고 휘신공주는 딸이라 살아남았지만 1524년에 구문경과 휘신공주의 묘를 세웠다는걸로 보아 이 무렵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폐비 신씨는 1537년에 사망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11월, '빈(嬪)'의 예우와 함께 속공[* 屬公. 임자가 없는 물건이나 금제품, 장물 등 관부로 넘기던 일을 말한다.]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는다. == 평가 ==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和平)하고 후중(厚重)하고 온순(溫順)하고 근신(勤身)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연산군|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연산군|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연산군|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로는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연산군|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연산군|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 [[폭군]]으로 유명세를 떨친 [[연산군|남편]]과는 반대로, '''[[현모양처]]'''로 평가받는다. [[내명부]]를 이끄는 [[왕비]]임에도 '''[[후궁]] 및 [[궁녀]]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만큼 겸손한 성격이었는데, 오죽했으면 사관들마저 "중전이 너무 답답하다"고 한숨어린 서술을 할 정도였다. * 남편 [[연산군]]도 신씨가 '궐내 야당'[*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폐비 신씨를 해당 호칭으로 표현했다.]으로 눈물로 직언해도 역정을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갑자사화]]를 시작으로 [[연산군]]은 조금이라도 자기를 거슬리게 했던 이들을 집어내 보복했는데 이게 진짜 죽여도 무방할 정도로 무례하게 굴어서 등의 이유가 아니라 단순한 간언(이극균)이나 경연에서 큰 소리를 내었다(권헌) 등의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행보를 보인 신씨에게는 역정 하나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전의 성덕을 기리도록 하라"며 칭송했으며,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유언도 "중전(신씨)이 보고 싶다"였다. * '''[[연산군]]과 달리 어그로를 끌 만한 짓을 자의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세자빈]] 시절부터 온화한 성품으로 윗사람에게 공손하며 아랫사람에게 자애로워 존경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폐위된 이후에도 부정적인 뒷소문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 가족 관계 == === 친정 ([[거창 신씨]]) === * 할아버지 : 신전 - [[황해도]]감사 * 할머니 : [[순흥 안씨]] * 아버지 : 거창부원군 [[신승선]][* [[1436년]](세종 18년) ∼1502년(연산군 8년). 세조 12년인 [[1466년]],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예종(조선)|예종]]의 즉위년([[1468년]]) 때 익대공신으로서 거창군에 임명된 후 고위직을 역임하다 신씨가 [[왕비|중전]]이 된 것을 계기로 영의정에 올랐다. 다만 과거 장원급제 등 본인의 능력도 좋은 인물이다.] - 영의정 * 외할아버지 : '''정간공 [[임영대군]] 이구''' - [[세종대왕|세종]]의 4남. * 외할머니 :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 * 어머니 : 중모현주 흥안부부인 이씨. * 오빠 : 익창부원군 [[신수근]] - 영의정. * 오빠 : 신수겸 - 형조판서. * 오빠 : 신수영 - 형조판서. * 언니 : 거창 신씨, 이형(李泂)에게 출가. - 회원군 이쟁의 장남이자 [[광평대군]]의 직계 증손자 * 언니 : 거창 신씨, 남경(南憬)에게 출가. * 언니 : 거창 신씨, 안환(安煥)에게 출가. * 여동생 : 거창 신씨, 유윤범(柳潤範)에게 출가. [[조선]] 역대 왕후들 중에서도 [[인현왕후]]와 더불어 보기 힘든 명문가 출신이다. 이는 자신의 조카딸이자 [[중종(조선)|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단경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외손녀이자 [[연산군]]이 그녀의 [[칠촌]] 조카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 중모현주 이씨는 임영대군의 딸로 세종의 손녀였으며, 오빠 3명 역시 고위직을 역임했다. 언니가 남경[* 신극성, 이장길과 더불어 삼맹호(三猛虎)라 불리며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한다.]이라는 인물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남치원이 성종의 서4녀인 경순옹주(숙용 심씨 소생)와 결혼한다. 거창군부인에게는 손아래 시누이 임과 동시에 이질부가 된다. === 왕가와 외가[* 외할아버지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이므로 외가와 시가가 같다.] ([[전주 이씨]]) === * '''배우자 : [[연산군]] (1476년 11월 6일 ~ 1506년 11월 6일)''' * 첫째 : 폐[[휘신공주]] 이수억 (1491년 10월 24일[* 《세자빈녀수억아기씨태지》에는 1491년 9월 22일 해시에 태어났다고 적혀있고《선원록》에는 1492년 생이라고 적혀있다.]~ ?) * 둘째 : 공주 (1492년 또는 1493년[* 추정이다. 1495년 1월, [[성종(조선)|성종]]이 죽은 이후에 쓰인 《성종대왕묘지문》에 "신씨가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성종이 죽기 전 태어난 것은 확실하고, 휘신공주와 원자의 출생연도를 감안하면 1492년, 혹은 1493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 ?) * 셋째 : 원자 (1494년 3월 29일 ~ 1494년 5월 4일) * 넷째 : 공주 (1495년 3월 7일 ~ ?)[* 다만 중궁(中宮)의 산실(産室)이 동궁(東宮)에 있는데, 다음 달은 바로 중궁의 산월이라 <후략>-《연산 1년 2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 * 다섯째 : [[폐세자 이고]] (1498년 1월 10일 ~ 1506년 10월 10일) * 여섯째 : 폐 [[창녕대군]] 이성 (1500년 6월 18일 ~ 1506년 10월 10일) * 일곱째 : 대군 이인수 (李仁壽, 1501년 5월 30일 ~ 1503년 10월 1일) * 여덟째 : (유산)[* 부친 신승선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유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중략) 1. 왕비(王妃)의 해산(解産)이 임박했는데, 만약 해산한다면 상사(喪事)와 소선(素膳)에 관한 일을 예관(禮官)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후략) - 《연산군일기,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3번째기사》] 14살이었던 [[1491년]]부터 최소 25살 때까지 자식들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 기타 == * [[연산군]]과 금슬이 좋았고 서로 사이가 좋았다. [[중종반정]]으로 [[유배]]된 연산군이 "아내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사망]]했다는 점도 그렇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꼈다는 말이 나오거나 그녀와 그녀의 [[친척]]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준다는 기록이 몇몇 보인다. 둘 사이에는 자녀도 많았고 [[갑자사화]] 당일 폭주하는 연산군을 유일하게 막아선 인물이 신씨이며 그 와중에 연산군은 그녀를 해하지 않고 돌아섰다. *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왕]]이 비록 미치고 포악하였지만 신씨는 왕을 소중히 여겼다고 언급되어 있다. * 흔히들 '연산군의 여자'라고 하면 [[장녹수]]를 쉽게 떠올릴 텐데 정작 장녹수는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 딸 하나밖에 없었다.[* 물론 영아사망이 상당히 흔했던 당시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너무 어릴 때 죽었던 아이가 더 있었을 수는 있으나 그걸 감안해도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기록을 보아도 연산군의 그 많은 [[후궁]]들에게서 얻은 자식들은 중전과 낳은 자식들에 비해 많지 않았다. 신씨의 시아버지 되는 [[성종(조선)|성종]]이 무려 28명의 자식을 보았지만 3명의 정실 부인([[공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사이에서 얻은 자식은 겨우 3명뿐이었고 나머지 25명의 자식들은 모두 후궁들한테서 보았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 [[연산군]]은 그녀를 볼 때마다 하던 만행을 멈췄으므로 어떻게 보면 '''연산군의 아주 작은 [[양심]]'''을 상징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록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신씨는 연산군의 거의 유일한 [[브레이크]]라고 할만한 존재였다. 이는 연산군이 신씨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중종(조선)|중종]]의 첫 정실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며 폐비 신씨의 조카이다. 단경왕후 신씨도 [[중종반정]] 직후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폐위]]되어 폐비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고모]]와 [[조카]]가 나란히 폐비가 된 셈. 폐비 신씨와 달리 [[단경왕후]] 신씨는 후에 복권이 되었지만 복권이 된 시기가 한참 뒤인 [[영조]] 대였기 때문에 당대 기록에는 둘 다 '폐비 신씨'로 되어 있다.[* 사실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당대 기록에서 [[단경왕후]]의 경우는 '성+비'로 된 명칭인 '신비(愼妃)'로도 호칭하는 경우가 많으나 '폐비 신씨'는 그렇지 않다. 거창군부인의 경우 남편이 폐출된 왕이었기 때문에 폐비로 불릴 수 밖에 없었으나 단경왕후는 단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반정공신들에 의해 강제로 내쳐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실록을 읽다 보면 연산군의 부인에 대한건지, 중종의 부인에 대한건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조선/왕실|조선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간택없이 [[세자빈]]으로 책봉된 사례이다. * [[요절]]한 자식까지 합쳐 4남 3녀가 있었다.[* 여덟번째 아이는 유산되었다.] 총명했던 [[폐세자 이고]]와 [[창녕대군]]은 [[왕자]]라는 이유로 반정 세력에게 피살[* [[사약|사사]]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절차상 성인에게 [[합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후 집행했을 때다. 이 건은 [[조선시대]]의 법으로도 엄연한 [[불법]]이었다.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이거나 16세 이상이라도 [[여성]]이라면 법적으로 사형은 불가했기 때문이다. [[노비]]로 전락시키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당장 [[황사영]]의 일가는 몰살했지만 자손은 사형을 면했으며 [[김자점]]의 자손도 마찬가지. [[윤임]]이 역적이 되어 일가가 몰살했지만 윤임의 아들 중에서 [[윤흥신]]부터는 사형을 면했는데 [[선조(조선)|선조]]가 복권시켜 줘서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대포에서 왜군을 막다가 장렬히 전사했다.]되었기에 결국 [[출가외인]]이었던 [[휘신공주]]만 남았다. 휘신공주는 능성 구씨 능양위 구문경(具文璟)[* [[세종(조선)|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외손자이다.]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는데 혼인 후에 연산군이 폐위됨에 따라 그녀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폐서인되어 [[공주]] 직첩을 회수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며 시아버지 구수영의 청으로 [[이혼]]까지 당하는 등 [[왕실]] 여인이 당할 수 있는 온갖 비참한 꼴을 다 당하게 된다. 다행히 1508년(중종 3년) [[중종(조선)|중종]]의 배려로 구문경과 재결합하고 [[집]]도 하사받았으나 공주 [[신분]]은 되찾지 못했는지 계속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 그 아들인 구엄이 연산군, 폐비 신씨, 의정궁주 조씨[* [[태종(조선)|태종]]이 늙어서 [[세종(조선)|세종]]에 의해 들여진 [[후궁]]이지만 태종의 이른 죽음으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원래 이 [[땅]]은 임영대군의 땅이자 조씨가 묻힌 [[무덤]]이었다.]가 나란히 묻혀 있는 [[도봉구]]의 묘를 지켰다. == 대중매체에서 == 보통은 [[막장]] 남편인 [[연산군]]을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하는 어질고 선량한 [[캐릭터]]로 나온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드라마|설중매]]에서는 배우 [[한애경]]이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배우 이은경[* 역사의 라이벌 [[장희빈]] vs [[인현왕후]] 편에서 [[희빈 장씨|장희빈]] 역할을 맡았다.]이 연기했다. 극중 연산군이 이성을 잃고 [[정현왕후|자순대비]]를 찾아갔을 때 온몸으로 [[연산군]]을 막아내어 대비를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드라마)|장녹수]]>에서는 배우 [[최선아]]가 연기했다. 당차고 [[권력]]욕이 강한 모습으로 나왔는데 그 모습에 연산군이 경계를 할 정도. 사실 연산군은 폐비 신씨에게 개인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눈치없이 연산군의 열등감을 부채질하는 발언과 행동을 자주 해서 눈 밖에 난다. 연산군을 은근히 무시하고 깔보는데 심지어 자기 어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연산군을 "큰어머니를 범한 패륜아"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이는 당대에도 [[소문]]으로 취급받던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 [[드라마]]에서 폐비 신씨 캐릭터에 대한 설정들도 [[정하연]] 작가의 [[사극]]들이 다 그렇듯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한 이야기들이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이시내가 연기했다. <[[장녹수(드라마)|장녹수]]>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기록과 비슷하게 묘사되는데 오빠 [[신수근]]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모습, 시어머니인 [[정현왕후]]와 시동생 [[중종(조선)|진성대군]]을 보호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와는 달리 남편인 연산군과 그닥 금슬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데 [[세자]] 시절부터 싹수가 심상치 않아보이는 남편을 내심 두려워하는 면모를 보이며[* 하필이면 자신의 처소에서 아버지, 오빠와 함께 [[폐비 윤씨|폐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예상치 못하게 연산군이 처소에 들어와서 "폐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지요?"라고 물을 때 엄청 뜨끔해한다. 이 때 아직 연산군은 [[성종(조선)|성종]]의 함구령으로 인해 자신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연산군은 자신의 부인에게 "부인도 날 멸시하고 깔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갈구기도 한다. 아버지 [[신승선]]이 죽었을 때 남편 연산군은 대놓고 [[장녹수]], [[제안대군]]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장인에 대해 [[고인드립]]을 날리는가 하면 할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처소에서 미쳐 날뛸 때 정현왕후와 함께 말리려다 오히려 연산군에게 "자기의 뜻을 거역하면 [[성종(조선)|자신의 아버지]]가 [[폐비 윤씨|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똑같이 [[사약]]을 내려버릴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받기도 한다. 심지어 [[장녹수]]가 후궁 첩지를 받아서 이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고 있다가 남편 [[연산군]]에게 "웃전으로서 응당 인사를 받아야지요, 안그러면 자칫 투기를 한다고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폐비 윤씨|우리 어머니]]께선 투기하신다는 이유로 '''사약까지 받으셨어요'''"라는 [[고인드립]]이 심하게 섞인 말까지 들었을 정도.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는 배우 [[박하선]]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어진 [[왕비]]로 그려지는데 선왕의 [[후궁]]들인 엄 귀인과 정 귀인이 자신의 남편 연산군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하는데도 그들을 극진히 대접해주는 [[대인배]]이다. 남편 연산군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장녹수도 출신이 천하다며 엄청 깔보는 [[소혜왕후|인수대비]]와 달리 장녹수를 후궁으로 잘 대접해주기까지 한다. 평소에 미쳐 날뛰는 연산군도 신씨만큼은 [[조강지처]]로 잘 우대해주며 장녹수에게 "중궁은 자신의 조강지처이니 만약 중전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날리기도 한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는 배우 홍소희가 연기했다. * 2017년 [[KBS]]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는 배우 [[송지인]]이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연산군]]보다 오빠 신수근과 자주 나온다. 연산군에게 아내이기보다 [[가족]]으로서의 언급이 종종 등장한다. == 참고 문서 == * [[단경왕후]] * [[성종(조선)|성종]] * [[성종실록]] * [[신수근]] * [[신승선]] * [[연산군]] * [[연산군일기]] * [[인수대비]] * [[임영대군]] * [[정현왕후]] * [[중종(조선)|중종]] * [[중종반정]] * [[중종실록]] * [[폐세자 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