黔日 ? ~ [[660년]] [목차] == 개요 == [[신라]]의 인물. 642년 [[대야성 전투(642년)|대야성 전투]] 당시 [[백제]]군이 [[대야성]](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을 함락하는 데 내통해 가담하고 백제에 [[귀순]]해 살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의하여 [[사형]]당한다. == 생애 == [[삼국시대]] 백제와 대치한 신라 서부 전선의 요충지인 대야성에서 대야성주인 도독 [[김품석]]의 [[부하]]로 있었는데 김품석에게 자신의 [[아내]]를 [[네토라레|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져 앙심을 품고 있었다.[* 검일을 성 밖에 내보낸 뒤 그날 아내를 취했다고 알려져 있다. 황천우 작가의 삼국비사에선 아내와 [[김품석]]이 바람을 피운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대부분 겁탈로 생각한다.게다가 겁탈이든 바람이든 간에 정상적인 지휘관 이라면 자기 부하의 아내를 건드려 후환을 만드는 짓거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여포]]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유부녀를 탐한 [[조조]]조차 죽은 적장의 과부나 첩이거나 전투에서의 전리품을 취하는 개념이였지, 자기 부하의 아내를 건드려 후환을 만들지는 않았다. 여포가 욕먹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642년([[선덕여왕]] 11년) 8월 백제 [[의자왕]] 휘하의 장수 [[윤충]]이 대군을 이끌고 대야성을 공격하자 [[모척]]과 같이 공모하여 백제군과 내통하고 백제 병사를 대야성 안에 있는 군량미 창고로 인도하여 불을 질렀다. 김품석은 그의 막료인 [[아찬]] [[서천]]으로 하여금 윤충과 협상하게 하여 목숨을 보전해 준다는 [[약속]]을 믿고 성문을 열어 일부 군사들을 대야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백제의 복병은 이들을 살해했다. 완전히 절망한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를 죽이고 [[자살]]했으며 대야성은 사지 [[용석]]과 [[죽죽]]이 성문을 굳게 닫고 끝까지 맞서 싸워 지켰으나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백제에 귀순한 뒤 백제에서 18년가량을 지냈지만 660년([[태종 무열왕]] 7년) 7월 13일 [[백제멸망전|백제가 신라에게 멸망할 때]] 검일은 신라군에 붙잡힌다. 이때 검일은 모척과 함께 3가지 죄(군량고를 불태우고, 김품석 부부를 위협해 죽였으며[* 사실 김품석 부부를 죽인 건 엄연히 [[동반자살|김품석 본인이었으며]], 김품석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배신한 대야성의 신라군들 이상으로 김품석을 그 자리에 앉힌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책임이 크며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부하의 아내를 탐했기 때문이다.],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한 죄)로 사지가 찢어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다만 기록상에서는 찢어 죽였다는 말이 있지만 [[거열형]]이라고는 되어있지 않아서 [[한국사]] 최초 거열형이라 보기는 애매하다. 간혹 죽기 전에 김품석하고 무열왕을 조롱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검일이 배신을 한 건 김품석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것과 그의 삽질 때문이었으나 한 명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인생이 비참해진 셈이고 검일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내 사위가 잘못했으니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런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자신의 딸과 사위가 죽었으니 눈이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긴 하다. [각주] [[분류:660년 사망]][[분류:신라의 인물]][[분류:백제의 인물]][[분류:거열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