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금천교)]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2> {{{#ffd700 {{{+1 '''경복궁 영제교'''}}}[br]{{{-1 景福宮 永濟橋}}}}}}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영제교, 너비=100%, 높이=100%)]}}} || ||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 {{{#ffd700 '''건축시기'''}}} || [[1395년]] {{{-1 (창건)}}} / [[2001년]] {{{-1 (복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제교1.png|width=100%]]}}} || || {{{#gold '''영제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제교.png|width=100%]]}}} || || {{{#gold '''[[경복궁 근정문|{{{#gold 근정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영제교의 모습'''}}}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금천교(왕궁)|금천교]]이다. [[금천교(왕궁)|금천교]]는 말그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암석|돌]] [[교량|다리]]이며,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했다.]와 [[밖|외부]]와의 경계[*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귀신|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러나 [[경복궁]]의 경우는 [[중문]]과 [[정전]] [[정문]] 사이에 금천이 있다. 그래서 영제교 역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과 [[경복궁 흥례문|흥례문]] 사이가 아닌, 흥례문과 [[경복궁 근정문|근정문]] 사이에 위치한다. == 역사 == 1395년([[태조(조선)|태조]] 4년) 9월, [[경복궁]]이 창건될 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이 그냥 ‘석교(石橋)’라고 불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9029_006|#]] 그리고 [[개천]]을 따로 파지 않고 그냥 흐르는 도랑 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태종(조선)|태종]] 대에야 비로소 제대로 금천을 팠고[[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7030_002|#]] [[세종(조선)|세종]] 대에 ‘영제교(永濟橋)’라는 이름을 붙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10026_003|#]]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폐허가 되었으나 영제교는 돌로 만들어서 큰 훼손 없이 남아있었다. 이후 270여 년 간 방치되었다가 1865년([[고종(대한제국)|고종]] 2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궁궐]]의 [[금천교(왕궁)|금천교]] 역할을 수행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고적도보 영제교.png|width=100%]]}}} || || {{{#gold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영제교'''}}} ||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경복궁 흥례문|흥례문]]과 주변 행각이 철거될 때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 영제교가 있던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지어지면서 1990년대 말까지 8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제 자리를 잃었다. 처음엔 [[조선총독부]] [[박물관]] 근처에 영제교 부재를 모아 두었다가 [[8.15 광복|해방]] 이후인 1950년대에 임시로 [[경복궁 수정전|수정전]] 앞에 설치했으며, 1970년대에 다시 [[경복궁]]의 동문인 [[경복궁 건춘문|건춘문]] 안쪽과 [[경복궁 근정전|근정전]] 사이로 옮겨 놓았다. 이렇게 여러 번 옮겨다니면서 [[교량|다리]]의 [[아치(건축)|아치]]도 2개였던 게 1개로 바뀌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옛 영제교 원본.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옛 영제교.png|width=100%]]}}} || || {{{#gold '''복원 전 영제교'''}}} || {{{#gold '''근정전 동행각 앞에 있었던 영제교. 오른편 공사 중인 건물은 [[경복궁 자선당|{{{#gold 자선당}}}]].'''[* 사진 출처 - MBC Archive.]}}} || 1990년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고, [[흥례문]] 일곽을 중건할 때 드디어 원래 자리로 돌아가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2년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보존 중인, 동구릉 외금천교 부재로 알려졌던 홍예석이 영제교 부재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해당 석재는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월대 석재들과 같은 장소에 보존되어 있다. [[https://m.yna.co.kr/amp/view/AKR20220107124000005|#]] == 금천 == 영제교 밑을 흐르던 [[경복궁]]의 [[금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삼청동천(중학천)으로 흘러들던 ''''대은암천(大隱岩川)''''이다. 현재의 [[청와대]] 경내에서 발원하는 두 물줄기 가운데 하나는 [[경복궁]] 밖을 빙 돌며 흐르다가 [[궁]]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경복궁의 북쪽 정방향 끝에 있는 수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와 향원지와 [[경회루]] [[연못]]을 채웠다. 두 물줄기는 [[경회루]] 남서쪽에서 합쳐져 남쪽으로 쭉 흐르다가 [[경복궁 영추문|영추문]] 언저리에서 동쪽으로 꺾이며 영제교를 거쳐 [[경복궁]]의 동남쪽 담 아래로 빠져나가 삼청동천(중학천)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경복궁 내의 많은 물줄기들과, [[경복궁 경회루|경회루]] [[연못]]의 물도 금천을 통해 경복궁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금천과 경복궁의 물줄기는 대부분 메워졌고[* 집옥재와 건청궁 사이부터 [[경복궁 경회루|경회루]] 서남쪽까지 있는 물줄기는 메워지지 않고 지금도 흐른다. 현재 이 물이 빠져나가는 부분은 복개가 되어있다.], 영제교 [[복원]] 시 다시 팠지만 딱 [[흥례문]], [[근정문]] 사이 영역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그 이유는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발전실과 지하 수장고때문이다. 그래서 현시점에선 금천 완전 복원은 무리이다.] 물도 흐르지 않으며 만약 영제교 금천에 물이 차있는 걸 봤다면 이는 [[비(날씨)|비]]온 뒤 고인 물이거나 아니면 관리소 측에서 채워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경복궁 경회루|경회루]] [[연못]]물도 다른 곳으로 빠지고 있다.] [[경복궁]] 영역 밖의 대은암천 구역도 상류의 [[계곡]] 부분을 빼고 지금은 전부 [[복개]]되었다. == 구조 == * 너비 약 10m(33자), 길이 약 13m(43자)로, 다리 위엔 귀틀석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길|돌길]] 3개를 놓았는데, 가운데를 [[왕]]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御道)로 정했고 어도 부분을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약간 높게 세워 [[서열]]을 나타내고 있다. * 다리 윗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암석|돌]] [[난간]]을 설치했다. 각각 양측 끝에 [[용]]을 조각한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13개의 돌 난간을 놓은 뒤 그 위에 난간을 고정하기 위해 단면이 8각형인 긴 돌을 얹었다. 난간 상부와 하부엔 앙련과 복련[* 앙련은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 모양의 무늬를 말하며 복련은 그 반대다.]을 각각 조각하고 상, 하부를 연결하는 가운데 돌은 연주문을 새겨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 얼핏 봐선 모르지만 아주 자세히 보면 중앙이 약간 솟아있다. [[비(날씨)|비]]올 때 빗물이 다리에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 [[교량|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건축)|아치]][* 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를 2개 만들고 윗부분 돌과 아치 돌 사이의 공간은 판축다짐으로 채웠다. 아치를 받치는 돌을 선단석이라 하는데, 선단석은 2단이며 전부 금천 바닥 밑에 박혀 있으나, 그 중 반 단은 밖으로 돌출되어있다. 그리고 선단석 밑에 지대석을 두어 더욱 튼튼하게 했다.[[https://blog.naver.com/hanmun2014/220865741251|#]] === 영제교 금천의 서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제교 천록.png|width=100%]]}}} || || {{{#gold '''영제교 천록. 영제교의 동북쪽에 있다.'''}}} || [[금천]] 축대 4방에 4마리의 서수 상이 있다. 온 몸이 [[비늘]]로 덮여있고 [[정수리]]에 [[뿔]]이 달려있으며 [[겨드랑이]]와 뒷 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게 나있는 모습이다. 이 녀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임진왜란]] 때 [[일본군]] 종군 [[승려]]로 [[경복궁]]을 직접 보았던 제타쿠(釋是琢)가 쓴 《조선일기》의 한 대목이다. > ...(중략)... 정면에 [[암석|돌]] 다리가 있는데 돌을 깎아 [[연꽃|연화]] 난간 [[기둥]]을 만들고, 다리의 좌우에 돌사자 네 마리를 두어 다리를 호위하게 했다. 다리 가운데에 깎은 돌로 여덣 자의 어도를 마련하고 '''석사자'''를 네 귀퉁이 모서리에 총 16마리씩 놓았다. ...(중략)... >---- > 《조선일기(朝鮮日記)》 제타쿠는 [[사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Lion이 아니라 산예(狻猊)라는 [[상상의 동물]]을 말한다. 그러나 산예는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불]]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 [[화재]]를 제일 두려워하는 [[궁]]에서 굳이 조각해서 둘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조선시대|조선 후기]] [[유득공]]의 아들 수헌거사는 《경복궁유관기》란 책에서 천록으로 소개했다. > ...(중략)... 다음 날 [[경복궁]] 남문([[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안으로 들어갔다. 남문 안쪽에 다리가 있는데, 다리 동쪽에 '''천록''' 두 마리가 있고 서쪽에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완연하게 [[조각]]이 잘 되어 있었다. 남별궁 뒤뜰에 [[등]]에 구멍 파인 천록이 있는데 똑같이 닮았다. 예전에 그런 적이 없는 걸로 볼 때 다리 서쪽에서 옮겨 온 것이 틀림없다. ...(중략)... >---- > 《경복궁유관기(景福宮遊觀記)》 천록은 《후한서》 - 영제기에 나온 [[상상의 동물]]인데, 요사스럽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즉, 외부의 [[잡귀]]를 막는 상징적 경계인 [[금천]]에 사악하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동물인 천록을 둠으로써 [[궁궐]]의 신성함을 더욱 돋보이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지 4마리의 천록 모두 금천 바닥을 마치 감시하듯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제교 천록 메롱.png|width=100%]]}}} || || {{{#gold '''영제교 서북쪽에 있는 천록'''}}} || 이 중 서북쪽에 있는 천록이 제일 유명하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메롱]]하고 있기 때문.(...) 이 사실은 극소수의 [[궁]] [[마니아]]들만 알다가 2006년 [[KBS]] 〈[[스펀지(KBS)|스펀지]]〉에서 소개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제작진은 《우리 궁궐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홍순민 [[명지대학교]] 교수를 찾아가 왜 그런지 물었는데, 홍순민 교수도 확답을 못하고, 그저 "조상님들의 해학이 담겨있는 게 아닐까.” 정도로만 얘기했다. 그래도 현재는 사람들을 절로 미소짓게하는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메롱[[해치]]라는 이름으로 캐릭터화까지 되었다.[[https://mobile.twitter.com/merong_Haechi|#]] [[분류:경복궁]][[분류:금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