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복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동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3> {{{#ffd700 {{{+1 '''경복궁 자선당'''}}}[br]{{{-1 景福宮 資善堂}}}}}}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경복궁 자선당, 너비=100%, 높이=100%)]}}} || ||<-2> {{{#ffd700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 ||<-2> {{{#ffd700 '''건축시기'''}}} || [[1427년]] {{{-1 (창건)}}}[br][[1553년]] {{{-1 (1차 중건)}}}[br][[1866년]] {{{-1 (2차 중건)}}}[br][[1999년]] {{{-1 (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cha.go.kr/1624517.jpg|width=100%]]}}} || || {{{#gold '''자선당[*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517&ccbaKdcd=13&ccbaAsno=0117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복궁]]의 건물로, [[왕세자]]와 [[태자비|왕세자빈]]이 머무는 [[동궁]]의 처소이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의식주|먹고, 자고, 입고]]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자선(資善)'은 ‘착한(善) 성품을 기른다(資)’는 뜻으로, [[중국]] [[북송]] 때 [[황태자]]의 강학소로 설치되었던 ‘자선당(資善堂)’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조선 초, 중기]]엔 [[정전#s-6]] [[경복궁 근정전|근정전]]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대한제국)|고종]] 때 중건한 이후 현재는 편전인 [[경복궁 사정전|사정전]]의 [[동|동쪽]]에 있다. [[현재]] [[현판]]은 각자장[*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의 제작 기능을 가진 [[장인]].] 철제 오옥진(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 역사 == [[경복궁]]을 창건했을 때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다. 그래서 [[태자|세자]]가 [[왕실]] [[어른]]을 찾아 문안하거나 경서 [[공부]]를 할 때 일일이 궁을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에 [[동궁]]을 지을 [[타이밍]]을 잡기도 애매했다. [[태조(조선)|태조]]의 [[태자|세자]]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때 [[살해|피살]]되고, 이어 세자가 된 [[정종(조선)|영안군]]은 거의 곧바로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세제였던 [[태종(조선)|정안군]]은 [[개성시/역사|개경]]의 [[동궁]]을 이용했고, 역시 얼마 지나지않아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한성부|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고,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세종(조선)|충녕대군]]는 어디서 거주했는 지 불분명하나 분명 경복궁 일대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8010_005|#]]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01018_001|#]] [[문종(조선)|문종]]은 [[태자|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가 [[태자비|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조선)|단종]]을 낳고 얼마 뒤 [[죽음|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세조(조선)|세조]] 8년(1462년)에는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동궁]]을 옮겼고[[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2011_001|#]] 이 때 자선당도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동궁 자리에는 예문관의 [[책]]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901019_002|#]] 1543년([[중종(조선)|중종]] 38년) 1월에 [[화재]]로 불탔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3801007_001|#]]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해 자재들도 마련하였으나 1550년([[명종(조선)|명종]] 5년) 경에 [[기와]]를 인수궁[*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불당이다. 1661년([[현종(조선)|현종]] 2년) [[자수궁|자수원(慈壽院)]]과 함께 철폐되었다.] 건립과 [[종묘]] 보수 등에 사용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509010_003|#]] 그래도 1553년([[명종(조선)|명종]] 8년)에 소실된 [[경복궁]]의 [[내전]]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동궁]]도 넓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그 사이에 복구한 듯하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10809028_001|#]] 이 때 상량문[* 새로 짓거나 고친 [[건물]]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을 당시 [[대제학]]이던 [[이황|퇴계 이황]]이 지었다.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대한제국)|고종]] 3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게 불하되어 일본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별채가 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경복궁 내 기존의 자선당 자리엔 [[조선총독부 청사#s-5|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들어섰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으로 옮겨간 자선당.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으로 옮기고 집고관 세운 이후 자선당.png|width=100%]]}}} || || {{{#gold '''오쿠라호텔로 옮겨간 자선당'''}}} || {{{#gold '''박물관 '집고관'을 세운 이후 자선당'''}}}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총독부 박물관.png|width=100%]]}}} || ||<-2> {{{#gold '''자선당 자리에 세운 '조선총독부박물관'. 훗날 '국립박물관'이 된다.'''}}} || 지금 [[건물]]은 1999년 12월에 [[문화재청]]에서 [[복원]]한 것이다. === 자선당 유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자선당 유구.png|width=100%]]}}} || || {{{#gold '''자선당 유구[*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515&ccbaKdcd=13&ccbaAsno=0117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위에 언급했듯, 1923년 자선당 [[건물]]이 불탄 뒤, 자선당의 기단은 [[불]]에 그을린 채 오쿠라 호텔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1970년대엔 아예 정원석으로 쓰였다. 그러다 1993년 김정동 [[목원대학교]] [[교수|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반환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95년 12월에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이 때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이 삼성문화재단에게 [[무상]]으로 기증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정확히는 [[삼성그룹]] 계열사 [[호텔신라]]와 오쿠라호텔이 [[자매 결연|자매 호텔]]이란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순조롭게 반환받을 수 있었고,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https://news.v.daum.net/v/20060912184325397?f=o|#]]] 원래는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보존하고 있다. 한동안 [[비공개]]였으나 2012년 11월부터 [[개방]]하여 볼 수 있다.[[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10601032530074004|#]] == 구조 == ● [[복원]]한 [[현재]]의 자선당을 기준으로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자선당 배치도.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자선당 대청.jpg|width=100%]]}}} || || {{{#gold '''자선당 배치도'''}}} || {{{#gold '''자선당 대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513&ccbaKdcd=13&ccbaAsno=0117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자선당 서쪽 방의 내부.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자선당 동쪽 방.png|width=100%]]}}} || || {{{#gold '''자선당 서쪽 방 내부[*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24514&ccbaKdcd=13&ccbaAsno=0117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gold '''자선당 동쪽 방 내부'''}}} || *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대청]]이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총 6칸, [[온돌|온돌방]]이 정면 2칸, 측면 3칸의 총 6칸이다(북쪽의 2칸은 쪽방). 온돌방은 좌, 우에 각각 있기에 총 12칸이다. [[마루|툇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총 3칸이 각각 대청 남, 북쪽에 있고(남북을 합쳐 총 6칸), 각 온돌방 남쪽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2칸이 있어(좌, 우를 합쳐 총 4칸) 총 10칸이다. 대청은 전부 한 공간으로 트여있으며, 방은 남, 북 축으로는 트여있으나 동, 서 축으로는 구분이 되어있다. * [[공포]]는 이익공[*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이며 [[기둥]] 사이마다 화반[* 공포 대의 기둥 사이마다 상하에 위치한 도리 방향의 긴 부재 사이를 받쳐주기 위해 사용하는 부재.]을 놓아 절제된 화려함을 강조하고, 그 위에 운공[* 이익공에서 화반의 윗부분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받치는 [[구름]] 모양의 목재.]을 설치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다. [[기둥]]은 네모나게 세웠으며 안에 2개의 고주[* 高柱, 이름 그대로 굉장히 높은 기둥을 말한다.]를 세우고 7개의 [[도리]]를 설치한 ‘2고주 7량가’ 형식을 띄고 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81220670|#]] [[단청]]은 모로단청[*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으로 하여 깔끔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 [[대청]]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루]]는 우물마루 양식으로 놓았고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완자 장지문으로 설치하고 거기에 불발기 문[* 가운데에만 창을 낸 뒤 위, 아래를 [[종이]]로 바른 형태.]을 덧대어 이중으로 만들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mun2014&logNo=220881220670|#]] == 여담 == * [[문종(조선)|문종]]은 [[태자|세자]] 시절 여기 머물면서 [[앵두]]를 좋아하는 아버지 [[세종(조선)|세종]]을 위해 자선당 주위에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열리면 직접 따서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궁녀]]들이 자선당을 '앵두궁'이라 불렀다고. * 1916년에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 ~ 1959)는 [[일본]] [[테이코쿠 호텔]]의 설계를 맡아 [[일본]]에 갔다가 오쿠라 호텔의 조선관으로 변했던 자선당에서 [[온돌]]을 체험한다. 이 때 라이트는 바닥에 [[파이프]]를 놓아 난방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1937년 이를 적용한 '허버트 제이콥스 하우스(Herbert Jacobs house)'를 만든다. 이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보일러#s-2.2|현대식 바닥 난방 보일러]]의 시초가 된다. * [[복원]]을 잘못했다는 말이 있다. [[잡상]]도 6개인데 5개로 줄고, 정면의 [[계단]]도 통계단이었는데 3개로 나누는 등 [[엉터리]]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자선당의 [[사진]]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옮긴 이후에 찍은 것들이라 이건 과정에서 변형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무시못한다. 실제로 자선당의 계단도 《조선고적도보》에는 2개의 계단으로 나타나있다.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minsu977/221086333172|이 포스팅]]을 참조. 다만 《조선고적도보》 및 자선당 유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측면의 계단을 복원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 [[출판사]] 크레용 하우스에서 자선당 주춧돌에 대해 쓴 [[동화]][[책]]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을 출간했다. 우리아 작가가 [[글]]을 쓰고 박나래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돌아온 자선당 주춧돌.jpg|width=100%]]}}} || || {{{#gold '''《돌아온 자선당 주춧돌》 책 표지'''}}} || == 매체에서의 등장 == [[복원]] 된 직후엔 [[동궁]]으로 [[사극]]에 많이 나왔다. 그러나 [[2000년대]] 중, 후반 부터 [[궁궐]] 촬영이 어려워진 이후엔 실제 자선당이 등장한 적은 없다. 대신 [[경상북도]] [[문경시|문경]]에 조성한 〈[[대왕세종]]〉 세트장에 자선당을 재현한 [[세트]]가 있어 그 곳에서 촬영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신 다른 [[건물]]로 나온 경우가 훨씬 많다.[* 대표적으로 〈[[정도전(드라마)|정도전]]〉 초반에서 [[고려]] [[성균관]] 대성전으로 나온 곳이 여기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강녕전, version=30, title2=보일러, version2=131, paragraph2=2.2)] [[분류: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