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경술국치)] [include(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 ||<-2>
'''{{{#ffffff 언어별 공식 명칭}}}''' || || '''[[한국어]]'''[*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이루어진 성격을 고려하여 강제성을 강조하는 표현이 많이 쓰이기도 한다. 이에 관한 내용은 본문 2문단과 5문단에서 자세히 후술한다.] || 경술국치(庚戌國恥)[br]국권피탈(國權被奪)[br]일한병탄(日韓倂呑)[br]한일병합(韓日倂合)[br]한일합병(韓日合倂)[br]한일합방(韓日合邦) || || '''[[일본어]]''' || 日韓併合, 韓国併合 || || '''[[영어]]''' || Japan–Korea Treaty of 1910[br]Japan–Korea Annexation Treaty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경술국치 - 한일합병조약 전권위임장.jpg|width=100%]] || [[파일:창덕궁 흥복헌.jpg|width=100%]] || || '''한일합병조약 전권위임장의 모습''' || '''한일합병조약과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진행되었던 창덕궁 흥복헌의 모습''' || '''한일병합'''([[韓]][[日]][[倂]][[合]]),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 '경술년에 나라가 겪은 치욕'이라는 뜻이다.]는 [[1910년]]([[경술]]년) [[8월 29일]] 월요일에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한 사건을 말한다. == 요약 == 조약명은 [[한일병합조약]]이다. [[일제강점기]]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다.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 (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본 측에서 1주일 동안 발표를 안 하고 있다가 '''8월 29일'''에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 조칙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 1907년 7월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 강제 퇴위 당시 일본이 뺏어간 것이라고 한다.]라는 행정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가 찍혀 있었을 뿐 [[대한제국]]의 국새[* 국가 간의 조약에는 국새를 사용해야 한다.]가 찍혀 있지 않았고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의 서명조차 없었다.[* 위 이미지에 적힌 순종의 휘인 척(坧)은 [[한국통감부]] 직원이 쓴 것이다. 순종 즉위 이후 결재방식이 전통적인 착압(着押) 방식에서 일본에서 사용하던 친서(親署)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 황제의 휘를 쓰게 되었는데 [[도용|통감부 직원들이 순종의 필체를 흉내내서 결재하는 일이 이미 많이 있었다.]] 저 조칙을 포함해서 여섯 사람 정도가 쓴 필체가 확인되었다고 한다.[[http://www.minjokcorea.co.kr/sub_read.html?uid=5866§ion=sc9|#]]] 이는 한일병합조약이 대한제국의 정식 조약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황실의 전권위임을 받은 [[이완용]]과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재면이 직접 조약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완용과 이재면은 제대로 된 전권 위임을 받은 바 없기에 이 사항은 이 조약의 합법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며 애초에 조선에는 이런 중요한 사항을 전권 위임하는 규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설령 전권 위임을 받았어도 그런 전권 위임은 원천 무효이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주시하던 열강들, 특히 [[영국]]과 [[미국]]이 이 병합조약을 지지하고 말고는 일한병탄조약이 당대 현실에서 실제로 기능하고 말고의 문제지, 당대 국제법상에서 불법이 되는 요건과는 전혀 무관함 또한 명심할 사항이다. 이게 근거라고 생각하는 건 일각의 순전히 자의적인 납득 요건에 불과하지 상식적으로 논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물론 당시 열강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진행되었고 이후에도 실제 효력을 발휘했으며 해당 조약의 합법성을 전제로 체결되어 지금까지도 기능을 발휘하는 중요한 조약들이 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불법부당이라고 한들 이 조약의 실제적 원천무효를 주장할 순 없다. 이와 같은 사항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해당 조약의 불법성을 밝혀내 당대 일제가 상당히 무리한 수준으로 조선의 국권을 유린했음을 입증할 순 있으며 이마저도 극구 막으려는 [[일본]]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 모를 사람은 어디에도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일제 한일병합 선전엽서.jpg|width=100%]]}}} || || {{{#000 '''한일병합 및 제국주의 선전 엽서'''}}} || 한일 [[병합]] 조약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 제국|일본]]령이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일 뿐[* 이 조약 전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사실상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일본제국은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의 외교적 작업을 진행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함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열강 세력들을 제거하면서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에 [[을사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광무 11)에는 [[정미 7조약]]으로 행정권과 입법권 박탈 및 군대 해산,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했고 이듬해 6월에는 [[한일약정각서]]로 경찰권까지 박탈하였다. 경술국치 즈음의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상태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국가인 [[애국가]]도 금지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부]]가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었고 [[일본 제국]]의 일개 지방 도시로 격하되었다. || [[파일:nikkanheigou.jpg]] || || 경술국치 당일에 인쇄된 소책자 "國民唱歌 日韓倂合(국민창가 일한병합)".[br]병합 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노래 2곡의 악보와 가사집이다.[br]벚꽃잎에 덮여 스러지는 듯한 [[태극기]]와 뻗쳐오르는 [[욱일기]]가 대조적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www&mode=view&art_id=201008111915471|기사]][* 기사의 "풍신 태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 태합(豊臣 太閤)]]"의 오자.] || == 명칭과 관련해서 == 한국에서는 주로 '국권피탈', '일한병탄', '경술국치', '경술왜란' '한일합방', '한일합병', '한일병합'[* 순서대로 '國權 被奪(국권 피탈)', 日韓 倂呑(일한 병탄), 庚戌國恥(경술국치), 庚戌倭亂(경술왜란), '韓日 合邦(한일 합방)', '韓日 倂合(한일 병합)'으로 표기한다.] 등으로 부른다. '경술국치'는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수치'라는 의미이며 '경술왜란'은 '[[삼포왜란]]', '[[임진왜란]]'처럼 '경술년에 [[왜놈|왜(倭)인]](=[[일본인]])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이것을 '한일합방'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합방'은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20세기에는 많이 사용되었지만 21세기에 와서는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이 크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일합방'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서는 한국병합(韓国併合) 또는 일한병합(日韓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조선병합(朝鮮併合)이라고도 한다. 원래 일본은 '병탄(併呑)'이란 말을 쓸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힘이 센 한쪽이 다른 쪽을 아울러 버린다는 의미가 한국인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일으킬까 봐[* 한자 탄(呑)자가 삼킨다는 뜻이라서 [[약육강식]]의 형국이 너무 잘 드러났다.] '병합'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012151465&code=210000|관련 내용 1]], [[http://www.ko2ja.co.kr/japan_history/view.asp?cgrCode=12C&pdsCode=200408090008&idx=175|관련 내용 2]]). 현재 국어사전에는 병합=합병 ≒ 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다음의 한자사전에서도 '병탄(竝呑)'을 "「아울러 삼킨다」는 뜻으로, 남의 재물(財物)ㆍ영토(領土)ㆍ주권(主權) 등(等)을 강제(強制)로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삼음"으로 정의하며 강제적인 느낌을 지닌 단어로 정의하고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어느 한국어 화자의 어감에도 '병탄'은 강제적인 느낌이 있다. 각주로 서술되었듯이 한자 '탄(呑)'자가 '삼킨다'는 느낌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조약 체결 당시의 [[일본어]] 공식명칭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關スル條約)'이다. 현재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이 명칭에서 유래한 '한국병합'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 [[대한제국]] 멸망 ==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한국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어 일본의 일부가 되었고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으며 한국의 백성은 일본 제국의 2등 국민이자 일본인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1392년]]에 [[고려]]를 무너트리고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5백여 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학부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 이 때문에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용직이 나가기 전 '''"나는 일당처럼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다"'''며 [[이완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반면 이때 일본에 협조한 [[매국노]]는 [[경술국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는데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본에 병합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약 하나만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아니다. 이전의 주변국들 간의 전쟁[* [[러일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커졌다.], 여러 차례의 조약과 이권 침탈로 인해 이미 사실상 일본의 종속국이 된 상태에서 경술국치는 이전의 조약들과는 달리 서류상 명의 이전의 성격이 강하다. === [[경술국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술국적)] == [[한일병합조약]]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일병합조약)] == 관련 어록 == >"[[메이지 덴노|짐]]은 [[대한제국]]의 [[순종(대한제국)|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대한제국을 들어서 우리 [[일본 제국]]에 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일제강점기|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왕공족|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 한국과 일본을 각기 동등한 자격으로 1:1로 통합하겠다던 기존 일본의 명분을 걷어차 버린 대목이다. 실제로 이에 낚인 [[이용구|사회인]]들도 당시엔 상당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최소한 [[이왕가]](李王家)를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 자체는 어기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 황실은 확실히 상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 귀족인 [[화족]]보다는 1단계 위로, [[일본 황실]]보다는 반단계 ~ 1단계 아래로 쳐 줬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은 것에 만족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대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부터 해방 후의 [[대한민국]] 정부도 [[복벽]]을 거부하고 [[공화정]]을 줄곧 고수하면서 동족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임정은 강령으로 '구황실을 예우한다'는 조항을 넣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예우한다는 것이었지 지금 [[일본 황실]]처럼 황조를 유지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 > '''일본 [[메이지 덴노]]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순종(대한제국)|짐(朕)]]이 부덕(否德)으로 [[조선/왕사|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일본 제국|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일본 제국|이웃 나라 대일본]] [[메이지 덴노|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리라. >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 >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8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순종실록 본편의 마지막 기사[* 이후 순종이 붕어하기까지의 기록은 순종실록 부록으로 이어진다.] > 융희 4년 8월 29일 월요 맑음 / 음력 경술년 7월 25일 병인일 > 경 조동희(趙同熙) 진(進) >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진 이용구(李龍九) 진 >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진 윤희구(尹喜求) 진 > 주사 조병억(趙秉億) 진 조성흡(趙性翕) 진 정낙붕(鄭樂鵬) 진 장석준(張錫駿) 진 >---- >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 >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 >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 >'''[[승정원일기]] 마지막 날 기사'''[[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A_A04_07A_25A_00030|#]], 이 기사를 작성한 후 [[승정원]]은 바로 [[한국통감부]]에 의해 전격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뒤에 세워진다. == 여담 == *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의거]]가 워낙 유명한 만큼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대한제국]]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급격한 합병에 부정적이었을 뿐 합병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며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대한제국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문서로. 즉, 온건파는 '''온건하게 한국을 합병하자'''는 쪽이었지 '''합병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어차피 합병은 됐을 거라는 뜻이다. *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시아공사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홍명희]]의 할아버지이자 홍범식의 아버지 홍승목은 [[친일파]]로서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민영환|자결한]] [[박승환|이]]는 없었다. *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http://web.archive.org/web/20130204083910/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8/h2007082818000124390.htm|#]]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조적으로 을사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 이미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해 입법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까지 장악해 중앙통치권력을 무력화했으며 이후 같은 해 보안법을 통해 각종 집회와 모임을 제재하여 조선인들의 회합을 차단하고 신문지법을 통해 통감부의 방향에 반하는 언론을 원천 차단했다. * 이미 [[대한제국]]의 중앙군은 1907년 강제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해산되었으며]] 그나마 지방 각지에서 저항하던 [[의병]]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채응언]]이 이끌던 [[황해도]] 의병을 제외하고는 와해되었다. 저항 여력이 있는 세력은 이미 국외로 탈출하여[* 서간도의 삼원보, 13도 의군이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 [[북간도]]의 용정 등.]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8월에는 사실상 주권을 박탈하는 서류상의 절차만 남겨둔 셈이었다. 한일병합조약 당일에는 이미 일련의 피탈 과정으로 인해 만연한 무력감과 국내 저항세력 부재로 인해 1905년 을사조약 당시보다 저항이 적었으며 이에 일부 해외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아예 1905년을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이 조약으로 인하여 한국은 약 35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일제의 패망날이던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광복]]되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일에는 백범 [[김구]]의 생일이기도 하였는데, 1925년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으로 잡아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주자 안 그래도 안 좋은 날이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회갑]]연도 못 챙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후에는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2009년 9월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이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 '''기념'''으로 일왕을 국내에 초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기념 자체는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억'의 강화 버전 혹은 영어 'commemorate/observe'에 대응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년 기념식 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고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사전 설명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대 [[한국인]]들은 '기념'을 영어의 'celebrate'에 준하는[* 여담으로 [[영어권]]에서도 해당 단어는 원칙상 '기념'의 뜻으로 쓰일 수 있으나 축제 분위기에 더 자주 쓰인다는 어감으로 인해 무거운 상황에서는 기피된다.] 긍정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이 문제가 될 만한 단어 선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 경술국치 100주년이 됐던 2010년 [[3.1절]]에 [[2010년 삼일절 사이버 전쟁|경인대첩]]이 일어나기도 했다. * 많은 사람들이 아래 사진을 경술국치가 일어난 당일날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경술국치 당일 찍힌 사진은 아니며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용으로 섭외한 [[비행기]]를 담은 사진이다. [[동아일보]]가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란 책을 내면서 이 사진을 경술국치 때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그 뒤로 비행기가 찍힌 부분을 잘라낸 사진이 여기저기 실리면서 오해가 생겼다.[* 다만 링크에 적힌 원문은 ''''합방이 되자 일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그들의 국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근정전 위를 날고 있는 것은 일군(日軍) 비행기 삼중호 (三重號)다.''''라고 되어 있어 경술국치 이후 줄곧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는 뜻이지 이것이 1910년에 찍힌 사진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73018|경술국치 109년…‘경복궁 일장기’ 진실은?, KBS]] [[파일:/news/201001/04/khan/20100104105319968.jpg]] * 한일병합 소식은 이웃국가인 [[청나라]]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는데, 당시 청나라 주일공사인 왕대섭(汪大燮)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 중국 [[만주]] 지역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주문을 제출하였다. 청나라 외무부에서도 만주 지역의 안전 문제, 특히 만주 거주 한국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길림순무(吉林巡撫) 진소상(陳昭常)에게 타전하여 [[장춘]](長春)·[[혼춘]](渾春)·[[연길]](延吉)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한국 병합 반대 움직임에 각별히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심지어 연길 거주 한국인들의 병합 반대 행동을 엄중 단속해 줄 것에 관한 주청일본공사 이쥬인 히코 키치(伊集院彦吉)의 요청마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출처: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에 관한 청 정부의 인식과 대응, 취안허슈(權赫秀) 중국 요녕대학 역사문화학원 교수]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 황실은 '[[만주국|우리 역시 한국 황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진지한 걱정을 하였는데 이미 당시 청나라 황실도 다 쓰러져 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선통제]]의 황태후이자 그의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효정경황후]]는 “[[삼한]]은 정말로 망하였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출처: 대공보(『大公報』), 宣統二年八月十八日(1910. 9. 21)]고 말하며 앞날을 우려했다. 경술국치 직전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재순(載洵. [[순친왕|감국섭정왕 재풍]]의 동생)은 청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인 군기처(軍機處)로 타전하여 한일합병 관련 소식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알아본 데 의하면 일본인(日人)이 장차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대거동(大擧動)이 있을 것인즉 위급존망(危急存亡)이 간발(間髮)에 걸려 있다. 아국(我國)이 만약 서정(庶政)을 더 이상 개혁하지 않고 시급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전철(覆轍)을 밟게 될 것으로 걱정되니 눈앞으로 다가온 화 때문에 두렵고 절박하기가 그지없다. 재순(載洵)은 (한국병합에 대한)견문(見聞)이 누구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진언(陳言)하니 대신 상주(上奏)해 주기 바란다.” >----- >출처-『淸宣統朝外交史料』 卷16, 18쪽. 이러한 황실의 우려는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 참고로 경술국치의 연도를 아는 한국인의 비율이 낮은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약 14%가 알고 있었으며 특히 70대 이상 아는 사람의 비율이 5%로 극히 낮았다.[[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316|갤럽 조사]] *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로 경술국치일에 조기를 달도록 규정했다. * [[마이클 잭슨]]이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8월 29일을 경술국치가 아닌 마이클 잭슨 생일로 인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 1995년 8월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한일합병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종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고 그동안 사회당 위원장으로서 침략전쟁 인정과 과거 사죄에 앞장서 온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55790|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연합뉴스 1995.10.11][*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61289_30705.html|무라야마 총리,'한일합방 조약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망언]] mbc 1995.10.11] 이런 발언에 대해 당시 [[외교통상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61411_30705.html|정부,무라야마 총리의 망언에 대해 늑장 대응]] mbc 1995.10.11] 당시 무라야마의 이 발언으로 인해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었고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경색되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61729_30705.html|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의 뉴욕 정상회담 취소]] mbc 1995.10.17][*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99534_30705.html|일본 무라야마 총리의 망언으로 한일관계 냉각]] 1995.10.18 mbc][*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5683|일본 총리 망언에 대한 강경대응 촉구]]]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 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한일합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합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5년 6월에는 와타나베 전 외무장관이 지방에서의 강연을 통해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5654|일본 무라야마 총리 망언 kbs 1995]]] 무라야마 총리는 17일에도 한일합병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합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무라야마 총리는정치적 도의적 실태 론으로 판단하면 한일합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지난 5일 한일합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5875|무라야마 일본 총리 "합병 합법" 되풀이 kbs 1995]]] 그러나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500289101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5&officeId=00028&pageNo=1&printNo=2397&publishType=00010|발언'잘못 시인]] 1995.11.13 한겨레][*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900099101004&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9&officeId=00009&pageNo=1&printNo=9274&publishType=00010|"日(일)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김)대통령 "韓國民(한국민)고통에 깊이사과]] 1995.11.19 매일경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900209106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9&officeId=00020&pageNo=6&printNo=23030&publishType=00010|韓(한)-日(일) 정상회담「과거사妄言(망언) 갈등」일단 봉합]] 1995.11.19 경향신문] == 병탄 전후 일본의 움직임 == === 행정 === [[일본]]은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대한제국]]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대체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임명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은 일본은 즉각 [[대한제국]]의 관청과 [[한국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을 흡수, 통합, 폐지시켰고 1,434명의 직원들을 해고했다. 한국인 고등관들을 모조리 해고했으며 각 도 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실무 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다마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다는 이유로 내쫓긴[* 사이온지는 다이아 수저급의 귀족이자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으로서 [[문민통제]]를 강조하고 군부의 득세와 전쟁을 극도로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사망하고 마지막 브레이크까지 사라지자 군부는 이듬해에 기어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으로 등용시킨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국장 고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일본 재무성|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겨우 남은 한국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한국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한국인 도장관을 전폐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 구 대한제국 황실 === [[대한제국]] 황실은 황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칭호도 다시 대한제국 이전 조선 시대처럼 [[폐하]] → [[전하(호칭)|전하]], [[태자]] → [[세자]] 식으로 [[제후]]의 격으로 격하되었다.]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한국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 1917년의 [[함흥시|함흥]] 순행만 해도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던 순종을 억지로 끌어내리다시피 행해졌다.]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접해 주었다. 일제는 [[경성부]]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만 해도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영친왕도 일본에서 일본 귀족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919년에는 구황실 지급 세비를 180만 엔으로 증액시켰다. 1917년 [[함흥부]] 순행은 눈여겨볼 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순행하는 순종도 황제 복식을 갖추었다. 게다가 [[함흥부|함흥]] 주민들도 순종의 함흥 방문이 조선 왕조 임금으로서는 태조 [[이성계]] 사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거의 환영 일색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주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부터 [[이왕]]의 [[작위]]와 봉록, 특혜를 거부하지 않자 많은 구황족들도 대일 항전에 동참하지 않고 일제가 제공한 지위와 특혜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기도 했다. 그와 별개로 500년간 조선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 온 이상 '''고종 생전에는 엄연히 복벽이 우세했다'''. 문제는 순종. 제대로 왕 노릇 해 본 적도 없고 독차사건 후유증으로 건강이 심하게 쇠약해져 독립해도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그가 고종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벌어진 [[3.1 운동]]부터 공화정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인사가 없는 것을 두고 황실에 실망해서 복벽을 주장하는 유림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유림도 당연히 끌어들이려 했다. 간재 전우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외국 끌어다 외국 물리치는 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불참했고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던 [[김창숙]], 김정호는 모친의 와병으로 기한을 맞추지 못해 민족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에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주권군주제|'''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대]]하는 것이다. 한편 근왕의식이 강했던 유생들 사이에서도 고종의 사망 이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20세기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상복 반대파의 대표는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고종은 일제로부터 독살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한 발 물러서서 상복을 입었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구 황족 입국을 철저하게 막았다. 황족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보탠 것도 없었는데 증거 없는 소문은 나돌고 있어서 일제 치하에서 독립하자마자 다시 나타나 제국의 부활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이승만 본인이 [[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첫걸음으로서 '제국'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승만이 권력욕이 상당했고 실제로 [[독재]]를 저질렀으며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등 구 조선-대한제국의 낡은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조차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확고했다. 결국 구 황족은 한반도에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로서 구심점이 만들어질 여지조차 남기지 않아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황실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대한제국을 떠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것이다. 이후 [[영친왕]]을 비롯한 해외 구황족의 귀국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정권을 잡고 나서야]] 가능해졌는데 이것조차도 감사할 일로서 구황족이 그 이상, 즉 황족에게 돈을 내 달라거나 [[경복궁]]을 황족에게 제공하는 요구를 할 처지는 못 되었다. 귀국조차도 세월이 흘러 구황실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악감정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복원을 위해 실제로 행동에 옮길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는 했다. 고종의 [[비자금]]도 [[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행방이 묘연해졌기 때문에 [[독립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일제가 주는 구황실 지원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당시 한국의 선진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화정]]을 선호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황실과는 대립 관계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 역시 말이 안 되었다. 대표적으로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만 봐도 "융희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날입니다."라고 했다. 물론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십수년간 삽질을 한 고종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이 시점에서는 이미 취할 수 있는 남은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분류:1910년/사건사고]][[분류:메이지 시대/사건 사고]][[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분류:대한제국의 사건사고]][[분류:외교 사건 사고]][[분류:무단 통치기/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