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4.jpg]] [[http://explain.egloos.com/5353856|사진 출처 : 신라인이 남긴 목간]] [[파일: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1.jpg]] [[파일: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2.jpg]] [[파일: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3.jpg]] [목차] == 개요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449번지 일대에 위치한 [[경주 월성]]의 [[해자]]에서 발견된 5세기 후반~6세기 경 [[신라]]의 [[목간]] 130여 점.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소장되었다. == 내용 ==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월성]]의 [[해자]]에서 발견된 [[신라]]의 목간들로, 1984년부터 1989년까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월성해자를 발굴조사하던 중 발견한 것들이다. [[경주 월성|월성]]은 신라가 존속할 때까지 궁성으로 기능한 곳으로, 성의 외곽에는 외부 차단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시설인 해자가 존재하였다. 이 해자에는 수백 년 세월 동안 신라인들이 실수로 빠트리거나, 혹은 일부러 버린 여러 가지 물건들이 층층이 쌓였다. 발굴 당시 매몰된 해자의 내부에서는 [[신라토기]]를 필두로 [[https://www.youtube.com/watch?v=oPLzSnbaP1o|목제 배, 방패]] 등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는데, 그 속에는 문자기록이 남은 목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발굴에 앞서 시행된 1984년 시굴조사과정에서 '다480N20트렌치 지표하 190 ㎝'를 시작으로 목간 총 26점이 발굴되었고, 이후 발굴로 1986년 12월 20일까지 130여 점이 출토되었다. [* 묵흔이 아직 인정되지 않은 추정 목간류를 포함할 경우 300여 점 이상이다.] 연구자들은 이곳이 신라의 궁성이었던 관계로 더 많은 목간이 땅 속에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예산]]과 발굴 기술[* 월성 조사 결과 해자 포함 6만 5천여 평에 이르는 부지 지하 아래에 고신라시대 유물이 빼곡히 들어찼음이 레이더로 확인되었는데, 현재의 기술로는 이를 전부 온전히 발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등 문제로 인해 80년대 마지막 발굴 이후 수십 년째 더 이상 발굴하지 않았다. 월성 해자 발굴 당시 구역을 총 4개로 구분하였는데, 목간은 조사구역 ‘다’에서만 확인되었고, 대부분 다480N20 그리드 내에서 수습되었다. 다 구역은 기준선 B-D를 연결시킨 선상에 위치하는데, 월성의 북편에 해당한다. 월성 해자에서 확인된 목간의 수종은 [[주목(나무)|주목]](27호, 77호), [[버드나무]](76호), [[밤나무]](28호), [[상수리나무]](51호), [[감나무]](13호), [[물푸레나무]](29호)를 제외하고 모두 [[소나무]](경송)인데, 소나무를 애용한 이유는 재료 획득의 용이함도 있었겠지만, 묵서를 하기 위한 나무 자체의 특성도 고려한 것이다. 침엽수는 활엽수에 비해 비중이 작고, 목재의 결이 균일하기 때문에 묵서를 했을 경우 [[먹]]의 퍼짐 현상이 활엽수에 비해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파일: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5.jpg]] <사진 출처 : 월성해자 출토 목간의 제작기법, 이동주(성림문화재연구원)> 월성해자 목간은 그 외형에 따라 다면의 봉형과 양면의 홀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전자는 원형 봉형목간과 4면체 봉형목간으로, 후자는 홀형과 횡재목간으로 세분할 수 있다. 또한 이 목간들을 만들 때 사용했던 5~6세기 신라시대의 도구들도 [[해자]]에서 함께 출토되었는데, 주로 쇠도끼(鐵斧), 쇠손칼(鐵刀子), 쇠못(鐵釘)과 기타 구리제품 183점이다. 특히 쇠도끼는 94점이 출토되는데, 다구역 뻘층 상부에서 76점, 목간이 확인된 흑색재층에서 15점이 수습되었다. 경주 월성해자 출토 목간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6세기 [[신라]]의 목간 양식이 훗날 [[일본]]으로 건너가 큰 영향을 주었다.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일본 아스카 목간과 8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 후지와라경 목간이 100여 년 전 신라 월성해자 목간의 양식을 그대로 전승받아 만들어진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으며, 특히 7세기 후반 아스카 목간의 글씨가 6세기 월성 해자 목간 글씨보다 못한 수준이라 6세기 경 신라의 목간 제작 문화가 매우 발전된 수준임이 확인되었다.[[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7812|고대 동아시아 서예자료와 월성 해자 목간]] 또한 이 목간의 내용을 연구분석한 결과 당시 신라어가 일본에 수출되어 9세기 한자의 일본화에 기여하였다는 가설 또한 나왔다.[[http://www.srbsm.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27530|서라벌신문 : “신라 이두 역사, 200년 앞당겼다” 신출토 월성해자 목간의 한자,‘ 爲在之’ (위재지)]] 2. 고대 [[한국어]]를 글로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 체계인 [[이두]]는 기존 학설에 따르면 7세기 말엽~8세기 사이에 그 표기법이 최종단계로 발전했다고 보았으나, 월성해자 출토 목간에 이미 이두 문법이 자유롭게 쓰이고 있어 신라인들이 8세기가 아니라 그보다 200여 년 앞선 6세기 이전부터 ‘동사의 활용’을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신라어 표기법을 발달시켰음이 드러났다.[[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487811|월성 해자 목간의 이두 자료]] 예를 들어 월성해자 목간에서 발견된 백견(白遣)이라는 이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경칭(敬稱) 동사로 ‘사뢰-’라고 훈독(訓讀)되는데 기존에는 [[원왕생가]]([[삼국유사]])와 불국사 석가탑 〈무구정광탑중수기〉(1024년), 〈서석탑중수형지기〉(1038년)에 가서야 나오던 글자이다. 또한 신라식으로 읽으면 ‘ (하)겨다’로 현대국어로 ‘하였다’라는 뜻인 위재지/교재지(敎在之)라는 글자도 가장 오랜 기록으로 발견되었다.[[http://www.srbsm.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27530|#]], [[http://explain.egloos.com/5353856|##]]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신라]] 왕궁에서 사용되던 목간들로, 6세기 경 [[한국]]의 서예 문화와 당시 신라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관련 항목 == * [[경산 신라 토지대장 목간]] * [[경주 월지 목간]] * [[경주 인용사지 출토 목간]] * [[대구 팔거산성 출토 목간]] * [[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 *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 [[분류:신라의 도서]] [[분류:간독]] [[분류:경주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