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계동궁'''}}}}}}'''[br]'''{{{#ffd700 '''桂洞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계동궁터,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북부 관광방 [[계동]][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75[* 구 지번주소로는 [[종로구]] [[계동]] 147번지.])}}} || ||<-2> '''건축시기''' || 미상 || ||<-2> '''철훼시기''' || 미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08 15-32-24.jpg|width=100%]]}}} || || {{{#ffd700 '''《문화컨텐츠닷컴》에서 제작한 〈계동궁 배치도〉. '이재원집'이 계동궁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궁가. 이름은 [[계동|동]] 이름에서 따왔다. [[사도세자]]의 서2남이자 [[연령군]]의 양손자 [[은신군]]의 [[제사]]를 받드는 종손인 [[완림군 이재원]]의[* 쉽게 말해서 [[흥선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사촌형.] 집이며 이후 사손(嗣孫)들도 계속 이 곳에서 살았었다. 그래서 이 곳이 [[연령군]] [[가문]]의 [[종가]]가 되었다. 1884년([[고종(대한제국)|고종]] 21년) 12월 5일, [[갑신정변]] 이튿날에 고종이 잠시 이곳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처음에 [[칠궁|경우궁]]으로 갔다가 겨울철 [[난방]] [[시설]]이 변변치 못해 경우궁을 떠나 이 곳으로 다시 옮겼고, 이어 새로운 [[개화파]] [[정부]]의 요인 명단을 여기서 발표했다. 집주인 이재원도 이 때 [[영의정]] [[벼슬]]을 받았다. 계동궁에는 [[완림군|완림군 이재원]], [[이기용(1889)|이기용]](이재원의 아들), [[이해청]]([[의친왕]]의 7남으로 이기용의 [[양자(가족)|양자]])이 3대에 걸쳐 살았다. 이기용이 언제 계동궁을 떠났는지는 모르나, 1945년 10월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해 10월 5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 이기용의 소재지가 정동 18번지로 나왔기 때문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35, 67] 계동궁은 1960년대에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 현재는 [[현대건설]] 사옥이 들어서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3260064.jpg|width=100%]]}}} || || {{{#ffd700 '''현대건설 사옥 앞에 있는 계동궁 터 알림 표지석'''}}} || == 역대 종주 == 1. [[연령군|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2. [[낙천군|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3. [[은신군|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사후 봉사손 지명.] 3. [[남연군|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4.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A 아버지(법적 기준)보다 먼저 죽었다.] 4.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 여기서부터 계동궁이란 이름을 썼다.] 5. [[이기용(1889)|이기용]](李埼鎔) --6. [[이해청]](李海淸)--[*A][* [[대한제국/황사|황실]] [[이름]]은 이광(李鑛), 아명은 이형길(李亨吉).] 이후의 계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