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주 국왕)] ||<-2>
'''{{{#ece5b6 주 13대 국군[br]{{{+1 太王[br]}}}태왕}}}''' || || '''[[성씨|{{{#fff 성}}}]]''' ||<#fff,#000>[[희]](姬) || || '''[[휘|{{{#fff 휘}}}]]''' ||<#fff,#000>단보(亶父) || [목차] [clearfix] == 개요 == >공숙조류가 죽자 아들 고공단보{{{-2 (古公亶父)}}}가 자리에 올랐다.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유의 사업을 다시 다스려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2 (薰育, 고대 북방의 부족 이름)}}}과 융적이 고공단보를 공격하여 재물을 얻으려 하자, 그들에게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쳐들어와 땅과 백성을 차치하려고 하자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자 고공이 말했다. >||'''“백성들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장차 자신들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오. 지금 융적이 공격한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저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 때문에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백성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 가면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는 격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 有民立君, 將以利之. 今戎狄所爲攻戰, 以吾地與民. 民之在我, 與其在彼, 何異. 民欲以我故戰, 殺人父子而君之, 予不忍爲.]|| >이에 데리고 있던 하인들과 함께 마침내 빈을 떠나 칠수와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 기산 아래에 이르렀다. 빈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아이는 손을 잡아끌고 다시 기산 아래 고공에게 몰려갔다. 또 이웃 나라의 많은 백성들도 고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몰려갔다. >---- >-[[사마천]] [[사기(역사책)|사기]] 주본기 (김원중 역) 고공단보(古公亶父)[* 마지막의 글자 父는 "부"라고 읽지 않고 "보"라고 읽는다. 上父가 상부가 아닌 상보로 읽는 것과 같은 이치.]는 [[주나라]]의 시조이다. 성은 [[희|희(姬)]], 이름이 단보이다. 고공은 벼슬 이름. 주나라가 세워진 이후 태왕(太王)으로 추증되었다. 전설 상의 군주인 [[황제(중국 신화)|황제(黃帝)]]의 35대손이며, 후직(后稷)의 12대 손이다. 적인(狄人)에 쫓겨서 기산(岐山)[* 현 [[섬서성]] [[바오지|바오지시]] 차산현(岐山县). 현재는 주원유지(周原遗址)란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근처에 [[https://baike.baidu.com/pic/%E5%91%A8%E5%A4%AA%E7%8E%8B%E9%99%B5/17928954/0/1f178a82b9014a90b677cc69ac773912b21bee9d?fr=lemma&ct=single#aid=0&pic=1f178a82b9014a90b677cc69ac773912b21bee9d|주태왕릉(周太王陵)]]이라 알려진 무덤이 있다.]으로 희성 일족과 주민 천 가구를 이끌고 본거지를 옮겼는데, 상나라에 의해서 이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이곳은 희성의 본거지가 된다. 장남 [[태백(오나라)|태백]]과 [[중옹]]은 아버지가 계력한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것을 알고 남쪽으로 내려가 [[오(춘추시대)|오나라]]를 세웠다. 삼남 계력(季歷)의 아들이 [[주문왕]]이고, 문왕의 차남 [[무왕(주)|무왕]]이 [[상나라]]를 무너뜨린다. == 여담 == 여담이지만 [[용비어천가]]에 [[이성계]]의 조상 [[목조]] [[이안사]]는 [[여진족]] 땅에서 살다가 여진족에 쫓겨서 [[원산시|덕원]]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고공단보가 적인에 쫓겨 기산으로 간 것에 비유된다. 이 장은 199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온지라 고공단보는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각주] [[분류:몰년 미상]][[분류:상나라의 제후]][[분류:주나라의 추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