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fff 북위의 황후[br]{{{+1 宣武高皇后 | 선무고황후}}}}}}''' || || '''[[시호|{{{#fff 시호}}}]]''' ||<(> 불명 || || '''[[성씨|{{{#fff 성}}}]]''' ||<(> 고(高) || || '''{{{#fff 휘}}}''' ||<(> 영(英) || || '''{{{#fff 출생}}}''' ||<(> 불명 || || '''{{{#fff 사망}}}''' ||<(> [[518년]] [[11월 12일]] || || '''{{{#fff 본적}}}''' ||<(> 발해군(渤海郡) 조현(條縣) || ||<|4> '''{{{#fff 재위}}}''' || '''{{{#fff 북위의 황후}}}''' || || [[508년]] [[8월 24일]] ~ [[515년]] [[2월]] || || '''{{{#fff 북위의 황태후}}}''' || || [[515년]] [[2월]] ~ [[515년]] [[3월 31일]] || || '''{{{#fff 부모}}}''' ||<(> 부친 고언(高偃)[br]모친 왕씨(王氏) || || '''{{{#fff 부군}}}''' ||<(> 세종 [[원각|선무황제]] (世宗 宣武皇帝)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세종 선무제 [[원각]]의 황후. [[문소황후 고씨]]의 남동생 고언의 딸. 출가한 뒤에 사망하여 따로 정해진 시호가 없다보니 사료에서는 "선무고황후(宣武高皇后)"라고만 지칭하였으나, 2019년에 요광사 절터에서 선무고황후의 묘비가 발굴되어 휘가 "영(英)"인 것을 알아냈다. == 생애 == 고영은 선무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아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낳았는데, 아들은 금방 요절하였고 딸은 자라서 건덕공주(建德公主)가 되었다. 정시 4년(507년) 10월, [[순황후 우씨]]가 병에 걸려 급사하니, 사람들 사이에서 고영과 고영의 숙부 [[고조(북위)|고조]]의 소행임을 의심했으나, 궁중에서 일의 언급을 금하고 비밀로 하여 끝내 진상을 알 수 없었다. 정시 5년(508년) 7월 13일[* 양력으로 계산할 시 8월 24일.], 선무제가 고영을 황후로 세우고 더욱 총애하였다. 고영은 투기가 심해 황제의 곁을 엄히 지켜 다른 비빈들은 선무제가 승하할 때까지도 감히 시중을 들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외척인 상서령 고조 역시 신분이 귀해지고 중용받아 권세를 함부로 부렸다. 영평 3년(510년) 3월, [[선무영황후 호씨|후궁 호씨]]가 선무제의 아들 [[효명제|원후]]를 출산하자, 황후 고영은 질투하여 여러 차례 원후를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선무제는 황자들이 번번이 요절하는 것을 근심하여 별궁(別宮)에서 모유를 수유할 유모와 아이를 잘 기르기로 유명한 부인들을 데려다 원후를 각별히 보살폈다. 특히 황후 고영과 호씨는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하여, 고영은 결국 암살할 틈을 찾지 못해 실패하였다. 연창 4년(515년) 정월, 선무제가 병을 붕어하자, 그 날 밤에 6세의 태자 원후가 즉위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황후 고영은 북위의 오래된 관습인 자귀모사(子貴母死)를 이용해 후궁 호씨를 죽이려 들었는데, 급사중 유등(劉騰), 중서자 후강(侯剛), 영군장군 어충(於忠), 태자소부 최광(崔光)이 저지하여 실패하였다. 연창 4년(515년) 2월, 그동안 선무제와 황후 고영의 비호 아래 전권을 휘두르던 사도 고조가 고양왕 원옹(元雍)에게 피살당하고 자살이라 공표되었다. 고영은 일단 황태후로 높여지기 하였으나, 선무제 사후 권력을 잃어 호씨가 황태비로 세워졌을 때 결국 실각당하고 금용(金墉)의 요광사(瑤光寺)로 내쫓겨져 명절이 아니면 황궁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이후 고영은 요광사의 비구니로 출가하고 법명을 "자의(慈義)"라 하였다. 다만, 고영의 6살짜리 딸 건덕공주는 궁에 남겨져, 황태비 호씨가 거두어 친히 길렀다고 한다. 신귀 원년(518년) 9월 24일[* 양력으로 계산할 시 11월 12일.], 고영이 잠시 요광사를 나와 어머니 무읍군군 왕씨를 만나러 갔다. 당시 하늘에 [[월식]]이 나타나 장차 국모인 호씨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호씨 역시 이를 불안해다가 재난을 면하고자 밤에 사람을 보내 고영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요광사에 보냈다. 신귀 원년(518년) 10월 15일, 고영은 비구니의 예로 장사가 치러져 [[북망산]]에 묻혔다. 고영은 황후였을 때 사납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영태후 호씨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아서 사람들이 고영의 최후를 안타까워 하였다고 한다. [[분류:남북조시대/황후]][[분류:한국계 중국인]][[분류:헝수이시 출신 인물]][[분류:518년 사망]][[분류:중국의 살해된 인물]][[분류:중국의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