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顧琛[br]고침}}}''' || || '''작위''' ||영수현오등후(永新縣五等侯) || || '''성''' ||고(顧) || || '''이름''' ||침(琛) || || '''자''' ||홍위(弘瑋) || || '''출신''' ||오군(吳郡) 오현(吳縣) || || '''생몰''' ||390년 ~ 475년 || || '''부친''' ||고담(顧惔) || || '''조부''' ||고이지(顧履之)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관료]]로 자는 홍위(弘瑋). 오군(吳郡) 오현(吳縣)을 본관으로 하는 오군 고씨 출신이다. == 생애 == 고침은 동진에서 사공을 지낸 [[고화]]의 증손으로 조부인 고이지와 부친인 고담은 모두 사도좌서조연(司徒左西曹掾)을 지냈다. 고침은 처음 양주의 종사(從事)로 기용되고 부마도위(駙馬都尉), 봉조청(奉朝請)을 지냈다. 423년, 태황태후 [[소문수]]가 죽은 뒤 고침은 대장승(大匠丞)으로 제수되었다. 고침은 뒤에 팽성왕(彭城王) 유의강의 참군(參軍), 진릉현령(晉陵縣令), 사도부 참군, 상서고부랑(尙書庫部郞), 오군 중정(中正)을 역임하였다. 430년,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이 [[도언지]]를 사령관으로 하는 북벌군을 일으켰지만 도언지의 북벌이 실패하면서 유송군은 모든 병기를 버렸고 무기고가 텅 비게 되었다. 이후 문제가 연회를 열 때 북위에서 귀순한 사람들이 배석해 있었는데, 문제가 고침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기고에 아직 몇 개의 무기가 있나? 고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0만 개의 무기가 있습니다. 438년, 의흥(義興) 태수로 전출되었다. 당시 유의강은 고침을 심복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고침이 유담에게 아첨하려고 하지 않아서 결국 나중에 유의강에게 배척당했다. 442년, 동양(東陽) 태수로 전임되었다. 당시 문제는 고침으로 하여금 유의강을 방비하게 하려고 했지만 고침은 완강하게 사양했고 이 때문에 문제의 노여움을 사서 여러 해 동안 집에만 있었다. 450년, 북위군이 남진하여 과보(瓜步)로 당도하자, 고침은 임시로 건위장군(建威將軍)에 제수되어 북위군과 교전하였다. 뒤에 동해왕(東海王) 유위의 관군부 사마로 제수되고 회계군의 사무를 맡았다. 수왕(隨王) 유탄이 유위를 대신한 뒤 고침은 다시 안동부 사마가 되었다. 453년, 문제 유의륭이 태자 [[유소(유송)|유소]]에게 시해당하고 유소가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유소는 회계군을 비롯한 5개의 군을 분할하여 회주(會州)를 설치한 뒤 유탄을 자사로 삼고 고침을 회계 태수로 삼고 오품장군(五品將軍)을 더했다. 그러나 유탄은 유소의 명을 받지 않고 거병하여 고침에게 관군장군(冠軍將軍)을 더했다. 한편 무릉왕(武陵王) 유준이 신정(新亭)에서 즉위한 뒤 유소를 토벌하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유송)|효무제]]였다. 고침은 효무제가 즉위한 뒤 오군 태수로 전임되었다. 454년, 오병상서(五兵尙書)로 제수되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다시 영삭장군(寧朔將軍), 오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또한 효무제의 거병에 기여한 공으로 영수현오등후(永新縣五等侯)에 봉해졌다. 457년, 오현령(吳縣令) 장개(張闓)가 모친의 상중에 무례한 행동을 저질러서 정위(廷尉)에 수감되었다. 당시 전당현령(錢唐縣令) 심문수가 판결을 잘못해서 탄핵을 받을 상황이었는데, 고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개는 처음 탄핵을 당했을 때 여러 차례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마땅히 심문수를 현에 남겨야 합니다. 효무제는 고침의 말을 듣고 분노했으며, 고침이 자신에게 잘못을 덮어씌웠다고 생각하여 고침을 면직시켰다. 고침은 모친이 연로했기 때문에 자신이 면직된 뒤 집으로 돌아가서 모친을 봉양했다. 고침과 서양(西陽) 태수였던 장목(張牧)은 모두 사공(司空) 유탄의 옛 속관이었기에 유탄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459년, 유탄은 광릉(廣陵)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자신의 문객인 육연임(陸延稔)을 고침에게 보내 고침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고 장목을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임명하고, 고침의 아들이자 상서랑(尙書郞)을 지냈던 고보소(顧寶素)를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삼고, 고보소의 동생이자 사공부 참군을 지냈던 고보선(顧寶先)을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고, 장목의 형이자 오군승(吳郡丞)을 지냈던 장제(張濟)를 관군장군으로 삼고, 장목의 사촌동생이자 사공부 주부(主簿)였던 장안(張晏)을 자의참군으로 삼았다. 당시 효무제는 고침이 유탄과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혹여 고침이 다른 뜻을 품지 않을까 염려해서 오군 태수 왕담생(王曇生)에게 고침 부자를 주살하라고 명했다. 마침 육연임이 먼저 도착하자, 고침은 곧바로 육연임을 사로잡아 죽이고 두 아들에게 육연임의 목을 효무제에게 바치라고 명했다. 고침은 효무제에게 다음의 서신을 보냈다. >유탄이 방자하고 제멋대로에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데, 신들은 나라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특히 유탄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금월 24일에 역적 유탄의 서신을 받았는데, 우리를 꾀어내려고 했습니다. 신은 곧바로 역적의 사자를 붙잡았고 아울러 유탄이 무군부 장사 심회문, 양주(揚州) 별가(別駕) 공도존(孔道存), 무군부 중병참군(中兵參軍) 공조(孔璪), 사병참군(司兵參軍)이었던 공환지(孔桓之), 사공부 주부였던 장안(張晏)에게 보내려던 서신을 얻었으니 모두 태수인 왕담생에게 보내겠습니다. 신은 곧바로 폐하께 투항할 것이며, 소신의 모친이 연로하여 제가 직접 모시고 있으니, 아들인 고보소와 고보선을 궁으로 보내 대죄하게 할 것입니다. 효무제가 구침을 주살하라고 보낸 사자도 그날 도착한 덕분에 고침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효무제는 고침을 칭찬하여 그를 불러내 서양왕(西陽王) 유자상의 무군부 사마로 삼고 장목을 무군부 중병참군으로 삼았다. 고침은 뒤에 오흥(吳興) 태수로 제수되었다. 460년, 오흥군의 많은 백성들이 翦錢及盜鑄 것으로 인해 면직되었다. 462년, 대사농(大司農)으로 기용되고 도관상서(都官尙書), 신안왕(新安王) 유자란의 사마, 동해(東海) 태수를 역임하고 남서주(南徐州)의 사무를 맡았다. 464년, 유자란이 무군장군으로 전임된 뒤에도 고침은 유자란의 사마를 지냈고 종전과 같이 태수의 벼슬을 받았다. 같은 해에 효무제가 붕어하고 태자인 유자업이 즉위한 뒤 고침은 다시 오군 태수로 전출되었다. 465년, 유자업이 시해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건강에 입성하여 즉위하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유송)|명제]]였다. 당시 사방에서 명제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반란을 일으킨 가운데 고침도 이 반란에 가담했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고침은 모친을 모시고 회계로 달아났다가 관군이 당도한 것을 보고 항복했다. 한편 고보소는 이때 자살했다. 고보소는 이윽고 모친상을 치른 뒤 원외상시, 중산대부(中散大夫)로 제수되었다. 고침은 475년에 죽었다. == 기타 == * 고침은 신중하고 성실한 성격이었으며, 겉만 번지르르한 것을 숭상하지 않았다. * 고침의 모친은 유탄의 반란 당시 100세가 넘은 나이였다. 동진 융안(隆安) 연간 초에 왕흠(王廞)이 반란을 일으킬 때 딸을 정열장군(貞烈將軍)으로 삼고 여자들을 관속으로 삼았을 때 공씨는 왕흠의 딸의 관속이 되었다. [[손은(동진)|손은]]의 난 이후 기근이 든 가운데 공씨는 집안의 재산을 털어서 고향 사람들을 구휼했고 아들을 나을 때 공(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390년 출생]][[분류:475년 사망]][[분류:쑤저우시(장쑤성) 출신 인물]][[분류:오군 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