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e8b57 0%, #2e8b57 0%, #2e8b57 80%, #2e8b57)" '''발해무목왕(渤海武穆王)[br]{{{+1 高懷德 | 고회덕}}}'''}}} || || '''작위''' ||<(>기국공(冀國公) → 발해군왕(渤海郡王)^^추봉^^|| || '''시호''' ||<(>무목(武穆)|| || '''최종직위''' ||<(>중서령(中書令)^^추증^^|| || '''성''' ||<(>고(高)|| || '''이름''' ||<(>회덕(懷德)|| || '''자''' ||<(>장용(藏用)|| ||<|2> '''출생''' ||<(>926년|| ||<(>[[후당]] 진정부(眞定府) 상산현(常山縣)|| ||<|2> '''사망''' ||<(>982년|| ||<(>[[북송]] 등주(鄧州) 무승군(武勝軍)|| || '''부친''' ||고행주(高行周) || || '''조부''' ||고사계(高思繼)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대십국시대]], [[북송]]시대의 무관으로 자는 장용(藏用). == 생애 == === 초기 생애 === 고회덕은 진정부 상산현 출신으로, 926년에 고사계(高思繼)의 손자이자 고행주(高行周)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운 연간부터 [[요나라]]가 [[후진]]을 침공하였는데, 고회덕은 아버지를 따라 정벌에 참여하고 싶어하였다. 고행주는 아들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자신의 수하로 두었다. 고행주가 거란의 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고회덕은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거란의 포위를 뚫고 아버지를 구출하여, 이때 세운 공적으로 나주(羅州) 자사를 겸임하였고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후진이 멸망할 때, 두중위가 거란에 항복하고 도적들이 일어나자, 고회덕은 성루를 보강하여 도적들을 막아낸다. 후진이 멸망하고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이 건국된 이후, 고회덕은 충주(忠州) 자사와 천평군(天平軍) 절도사를 겸임하였다. === 후주 시기 === 고회덕은 [[후주]]의 태조가 되는 [[곽위]]로부터 신임을 받았는데, 고행덕 사후 동서반도지휘사(東西班都指揮使) 겸 길주(吉州) 자사로 임명되었고 철기도지휘사(鐵騎都指揮使)로 전임되었다.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의 [[유민(북한)|유민]]이 후주를 침공하자, 고회덕은 시영의 선봉도우후가 되었고, 고평(高平)에서 북한에게 승리하여 이때의 공적으로 철기우상도지휘사(鐵騎右廂都指揮使) 겸 과주(果州) 단련사로 승진하였다. 고회덕은 회남 정벌에도 참가하여, 용첩좌상도지휘사(龍捷左廂都指揮使) 겸 악주(岳州) 방어사로 승진하고 준마 7필을 하사받았다. 세종이 연운을 정벌하면서, 고회덕에게 [[한통]]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창주(滄州)로 향하도록 하였다. 고회덕은 다시 진사양(陳思讓)을 보좌하며 웅주(雄州) 병마도부서(兵馬都部署)가 되었고, 와교관(瓦橋關)에서 승리하여, 요내빈(姚內斌)을 사로잡고 돌아왔다. 959년 [[공제(후주)|공제]]가 제위를 계승한 뒤 고회덕은 시위마군도지휘사(侍衛馬軍都指揮使) 겸 강녕군(江寧軍) 절도사로 발탁되었으며, 다시 북면행영마군도지휘사(北面行營馬軍都指揮使)가 되었다. === 북송 시기 === 960년 [[북송]]이 건국되고, 고회덕은 [[태조(송)|태조]]에 의해 전전부도점검(殿前副都點檢)으로 제수되었으며, 이후 관남부도부서(關南副都部署)를 역임하였다. 또한 태조의 누이인 [[진국대장공주#s-1|연국장공주]](燕國長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가 되었다. 북송이 건국되자, [[후주]]의 구신이었던 [[이균]]은 북송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고회덕은 태조로부터 [[석수신]]과 함께 이균을 공격할 것을 명령받아 이균의 군대를 택주 남쪽에서 물리친다. 이균이 평정된 뒤, 고회덕은 충무군(忠武軍) 절도사, 검교태위가 되었다. 고회덕은 태조 재위기에 양주 정벌에도 참가하여 귀덕군(歸德軍) 절도사로 전임되었으며 동평장사가 더해진다. [[태종(송)|태종]] 재위기에 고회덕은 시중을 겸임하고 검교태사가 더해졌다. 고회덕은 978년 병에 걸렸지만, 병을 무릅쓰고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 정벌에 참가하였고, 조주(曹州) 창신군(彰信軍) 절도사가 되었으며, 기국공(冀國公)으로 책봉되었다. 고회덕은 982년 등주(鄧州) 무승군(武勝軍) 절도사로 임명되었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북송 조정에서는 고회덕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을 추봉하고 무목(武穆)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중서령으로 추증하였다. == 기타 == 고회덕은 무관 집안의 자식으로 군사를 연습하였고,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단순하고 솔직하며,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한 무예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음률에도 정통하여 [[절대음감|곡에 맞추어 노래할 때는 그 음이 정교하고 교묘하였다고 한다.]] [[분류:오대십국시대/인물]][[분류:926년 출생]][[분류:982년 사망]][[분류:송나라의 추존 왕]][[분류:스자좡시 출신 인물]][[분류:송나라의 외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