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송(남조)/인물]][[분류:347년 출생]][[분류:422년 사망]][[분류:사오싱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목차] == 개요 == 孔靖 (347년 ~ 422년) [[동진]], [[송(남조)|유송]]의 장수로 자는 계공(季恭)이다.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출신. 동진에서 거기장군으로 추증된 [[공유(동진)|공유]]의 손자이다. [[송서]]에서는 무제 유유의 조부 [[유정(동진)|유정]]을 피휘하여 공계공으로 나온다. == 생애 == 공정은 군에서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공조사(功曹史), 저작좌랑(著作佐郞), 태자사인(太子舍人), 진군부(鎭軍府) 사마를 역임했고 사도 좌서연(左西掾)으로 임명되려다가 모친상을 당했다. 401년, 상중에 건위장군(建威將軍), 산음현령으로 기용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동진의 장수인 [[무제(유송)|유유]]가 [[손은(동진)|손은]]을 토벌할 때 여러 차례 회계군을 찾았는데, 공정은 정성을 다해서 유유를 예우했다. 한편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즈음, 유유는 환현을 토벌하려는 계획을 공정과 논의했다. 공정은 산음현이 건강에서 멀고 또한 환현이 제위를 아직 찬탈하지 않았으니,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기를 기다렸다가 경구에서 환현을 토벌해도 늦지 않다고 유유를 설득했고 유유 또한 공정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우소부(虞嘯父)가 정동장군(征東將軍), 회계군 내사로 임명된 뒤 공정은 처음에 정동부의 사마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유유가 환현을 토벌한 뒤 공정은 회계군 내사로 임명되었고 유유의 사자와 마주친 뒤 밤에 뱃머리를 돌려 회계군으로 향했다. 공정은 관부의 문을 두드려 우소부에게 자신이 회계군 내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렸고 우소부에게는 별재의 청소를 명한 뒤 회계군에 입성했다. 우소부는 본래 환현에 의해 임명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환현의 패전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서 죄를 청했는데, 공정은 우소부를 안심시켜서 잠깐 제자리에 머물게 했다. 공정은 회계군에 부임하면서 관리와 실효를 추구했고 겉치레를 금지했으며, 게으른 이들에게 벌을 내려 경내를 안정시켰다. 공정은 뒤에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임명되고 급사중(給事中)이 더해졌으나 받지 않았다. 다시 시중(侍中)으로 제수되고 중정(中正)을 겸임하였으며, 대사마(大司馬) 낭야왕(琅邪王) 사마덕문의 사마로 임명되었다. 뒤에 오흥군(吳興郡) 태수로 전출되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더해졌다. 공정이 부임하기 이전, 오흥군에서는 자주 태수가 목숨을 잃었는데, [[항우]]의 영혼이 변산(卞山)의 치소에 있어서 항우가 태수들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때문에 오흥군으로 부임한 이천석의 관리들은 치소를 피했는데, 공정은 치소에 거처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서우복야로 옮겼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412년, 도독5군제군사, 정로장군(征虜將軍), 회계군 내사로 임명되었다. 공정은 회계군에 다시 부임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경전의 학습을 감독하였다. 414년, 다시 상서우복야가 되었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뒤에 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제수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대중정(大中正)을 겸임하였다. 416년, 벼슬에서 물러나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임명되고 산기상시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당시 유유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 정벌을 추진하면서 공정은 자신의 종군을 요청하였고, 태위부 군자좨주(軍諮祭酒), 후장군(後將軍)으로 임명되어 후진을 정벌할 때 종군하였다. 418년, 유유가 상국(相國)이 된 뒤 공정은 다시 승진하였다. 419년 유유가 송왕에 봉해진 뒤 공정은 상서령으로 임명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았고 결국 시중, 특진(特進),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임명되었다. 공정이 벼슬을 사양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때 무제가 직접 공정을 전별했고 대신들이 공정의 행적에 대해 시를 지어주었다. 420년, 유유가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동진)|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송(남조)|유송]]을 건국한다. 이때 공정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더해졌으나 벼슬을 여러 해 동안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이후 422년에 사망하여 시중,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공정의 아들 공산사(孔山士)는 시중(侍中), 회계군태수(會稽郡太守)를 역임했다가 동생인 가부랑(駕部郞) 공도양(孔道穰)이 양가의 자녀를 겁탈한 죄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책이 없는 상태에서 회계군 태수를 겸임했다가 450년에 죽었다. 공산사의 아우 [[공영부]]의 행적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