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 '''광교산 전투'''[br]光敎山 戰鬪}}} || || '''장소''' ||<-2>[include(틀:지도, 장소=광교산, 높이=200, 너비=100%)] || || '''시기''' ||<-2>[[1637년]] [[1월 30일]] ~ 31일[br]([[인조]] 15년 음력 1월 5일 ~ 6일) || || '''장소''' ||<-2>[[조선]] [[경기도]] [[용인시|용인현]] [[광교산]] || || '''원인''' ||<-2>전라도 근왕병의 남한산성 구원 || ||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width=23]] [[조선]] || [[청나라]] || ||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width=23]] 전라병사 김준룡 || 호쇼이 어르커 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도]] [br] 초품 1등공 [[슈무루 양구리]] † || || '''병력''' ||2,000여 명 ||3,000여 명 || || '''피해''' ||전방 부대 패전 ||'''초품 1등공 양구리 전사''' || || '''결과''' ||<-2>조선의 대승, 양구리 전사, 남한산성 구원은 실기(失期).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bjz4r7jWoQc)]|| || 광교산 전투 || [[조선]]의 [[병자호란]] 때 벌어진 전투이자, 근왕군이 격파되지 않은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숭덕제|홍타이지]]의 매부인 '[[슈무루 양구리]]'[* 음차해서 한자로 양고리(揚古利)가 되는데 대개 이 음차로 많이 알려져있다.]가 전사'''했다. 양구리는 당시 청나라에서 전투 경험으로는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숙장으로, 험천 전투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연히 양구리의 전사는 청군에 큰 충격을 줬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이 정도의 고위급 [[장수]]가 전사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청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전라도 근왕병과 양구리의 움직임 == 1636년 12월 20일(이하 음력),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룡은 급히 전라도 각 고을에서 병력 6,000명을 모았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이끌던 [[승병]] 2,000명도 합류하여 총 8,000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진하기 시작했다. 1637년 1월 2일, 양지에 도착하자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000명을 주고 먼저 [[남한산성]]에 진군하게 했다. 한편,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청군은 1월 2일 험천 전투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 후 도도와 [[슈무루 양구리|양구리]]는 김준룡의 2,000명의 선봉대의 소식을 들고 곧장 병력을 광교산 동쪽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 김준룡 부대의 연락을 차단하고, 3천여 명을 인솔하여 [[광교산]]으로 향한다. == 전투 전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CP0208401121_f00001.gif|width=100%]]}}} || || {{{#000000 ▲광교산 전역도[* 지도의 오른쪽에 나와있는 정세규는 충청 감사로, 광교산 전투 3일 전에 벌어진 험천 전투를 뜻한다.] }}} || > 1637년 1월 7일에 조선의 전라, 충청 양도의 순무와 총병이 병력을 합쳐 구원하여 와서 남한산성에 영을 세웠다. > > 상(홍 타이지)이 듣고는 화석예친왕(호쇼이 어르커 친왕) 다탁(도도, 누르하치의 #15남)과 > > 초품공 액부 양고리(양구리)을 보내 병력을 인솔하여 기회를 보아 반격하게 하였다. > > 다탁과 양고리 등이 명을 받들어 가서 보니 때마침 눈이 와 하늘이 흐리고 어두워 적의 군영을 보지 못 하였다. > > 마침내 병사를 풀어 진격하여 깨트렸다. > > 그 산 아래에 진을 친 군대를 추격하여 산 정상의 적의 군영에 이르렀다. > > 다탁이 뿔피리를 불게 하여 병력을 모으고 양고리를 소환하여 산에 오르게 하였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 > 양고리가 가다가 때마침 석굴에 매복한 한 명의 조선의 패잔병과 마주하였다. > > 은밀히 조총으로써 양고리를 쏘아 명중하니 중상을 입어 졸하였고 이때 나이 66세였다. > > 양고리는 무릇 앞장서서 적을 격파하고 승전한 것이 공적록에 있었고 > > 국가에 뛰어난 공훈을 세움에 있어 열심히 노력함이 많다 하였다. >----- > - 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7일 [[https://cafe.naver.com/booheong/159115|출처(조선의 반격 광교산 전투와 양고리 전사!)]] > 1636년 12월에 태종이 친히 조선을 정벌하였는데 양고리가 종군하였다. > > 1637년 1월에 군대가 한강을 건너 강기슭에 주둔하였는데 > > 조선 전라, 충청 2도의 병력이 구원하여 와사 한성 남쪽에 영을 세웠다. > > 이달 7일에 태종이 예친왕 다탁(도도)과 더불어 양고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는데 > > 마침 눈이 와 흐리고 어두웠는데 적이 산 아래에 진을 치니 병사를 풀어 진격하였고 산기슭으로부터 그 산꼭대기에 이르니 > > 다탁이 뿔피리를 불어 양고리를 불러 산에 오르게 하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 > 양고리가 장차 내달려 다다렀는데 조선의 패잔병이 언덕 옆에 매복하였다가 > > 조총을 몰래 발사하니 양고리가 명중하였고 상처가 중하여 마침내 졸하니 이때 나이가 66세였다. > > 다음날에 다탁이 병력을 인솔하여 적의 영에 육박하였는데 조선군은 이미 밤에 달아났다. > > 양고리의 시신을 얻어 이로써 돌아왔다. > > 태종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고 곡하였으며 어용(임금이 쓰는 물건)과 관복을 하사하여 이로써 염하게 하였다. > > 상여가 돌아오자 태종이 교외에서 맞이하였고 명하여 복릉(태조 누르하치의 능)에 배장(시신을 임금의 능 곁에 묻음)하였다. > > 장사를 지내는 날에 태종이 다시 친히 제사를 지냈다. >----- > - 清史稿/卷226 [[https://cafe.naver.com/booheong/159029|출처(태조의 돌격대장 조선에서 전사하다!(광교산 전투))]] 1월 4일, 광교산에 도착한 김준룡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수품을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태세를 갖추며 남한산성과 연락을 시도한다. 1월 5~6일, 마침내 호쇼이 어르커 친왕 도도가 지휘하는 청군이 광교산 부근에 도착한다. 산 기슭에 주둔한 전방 부대를 발견한 청군은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을 시도하나, 조선군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진영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진형을 잘 정비해놨다. 청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총포]]로 집중 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청군이 퇴각하면 궁병과 등패수가 청군의 배후를 가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수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조선군은 총포를 쏘고 불을 지피는 등 자신들이 왔다는 걸 [[남한산성]]에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승전 소식을 전하여 패닉 상태의 조정을 안정케 했다.[*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하여 여러 차례 접전을 벌여 승리하는 일이 꽤 있었고 바야흐로 기회를 보아 헌릉(獻陵)으로 전진할 계획이라는 일로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 1월 5일] 김준룡과 함께 근왕대를 이끌고 왔던 전라도 중영장 우상중(禹尙中)의 증언에 의하면 양 군은 동틀 때부터(平明) 밤9시 ~ 11시(二更)까지 싸웠다 하니 매우 치열한 접전이었을 것이다. 1월 7일, 이 날은 특히 눈이 많이내리고, [[안개]]도 낀 날씨라 피차간 시야가 매우 좋지 않았다. 광교산 기슭에서의 전투는 결국 근왕군의 패색이 짙어져 조선 병사들이 흩어졌는데, 당시 도도는 안개로 시야가 흐린 탓에 청병을 풀어 이들을 추격하고 본영을 찾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산 정상에 위치한 김준룡의 본영을 탐지하자, 도도는 소라고동을 불어 흩어져 있는 청군을 집결시켰다. 산 기슭에 있던 [[슈무루 양구리|양구리]]는 [[고둥|소라고동]] 소리를 듣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나, 그 과정에서 [[석굴]]에 숨어 있던 조선 병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밤이 늦도록 [[슈무루 양구리|양구리]]의 행방이 묘연하자, [[아이신기오로 도도]]는 김준룡의 본영을 공격하지 않고 대치했으며 결국 산 기슭으로 철군했다. 김준룡은 이 틈을 타서 횃불을 켜두고 야영하는 것처럼 속이고 천여 마리의 말을 매어둔 채 [[수원]] 방면으로 퇴각했으며, 1월 8일 날이 밝자, 도도는 [[조선군]] 본영을 총공격하나 허탕을 치고 양구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날 양구리의 시신을 확인한 홍 타이지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통곡을 멈추지 않았으며 양구리에게 자신의 어복과 흑색 초피 갖옷 등을 내주어 염하고 초상을 치렀다. [[http://sillok.history.go.kr/mc/id/qsilok_003_0330_0010_0010_0060_0010|#]]《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에 따르면, 홍 타이지가 슬퍼하는 것을 정탐하다가 달아난 조선 졸병을 양구리를 해친 자라고 하여 우야 어선(esen)[* 이 공로로 어선은 홍타이지에게 남작 작위를 받게 된다. 참고로 이 사람은 [[옹정제]]와 순군왕 윤제의 어머니 [[효공인황후]]의 할아버지로 옹정제가 즉위한 후 외가를 챙겨주고자 작위를 남작에서 1등승은공으로 올려준다. 이것 때문인지 몰라도 양구리 역시 1731년에 공작에서 추봉군왕으로 작위가 올라간다. 참고로 어선의 고손자인 조혜는 [[건륭제]] 당시 [[준가르]] 정벌전에서 [[부찰 부항|부항]], 반제, 아규, 책릉 등과 함께 공을 세워 1756년 공작 작위를 받는다.] 으로 하여금 잡아 죽여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청사고]]》 도도 열전에도 양구리 저격병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일을 가르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한편 이시방은 김준룡이 수원을 향한 게 패퇴했기 때문이라 판단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은다며 공주로 도망가 [[금강]]의 다리를 끊고 머무른다. 이시방이 후퇴함으로써 본대와 연락이 끊긴 김준룡의 선봉대도 수원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청의 무응답 속에서 재차 사신을 청 군영에 보내고자 하던 [[인조]]에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수성군의 사기를 올리고자 한 대사간 김반은 김준룡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산에게 패배를 당하게 한 이시방을 처벌하여 군율을 세울 것을 청하지만, 인조는 이것을 당장 실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09_003|#]] 1월 13일, 인조는 결국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을 보내 관온인성이라는 홍 타이지의 존호를 찬미하고 소방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11_003|#]] 글을 받들고 청 군영에 가게 하였으며, [[잉굴다이]]에게 즉시 회보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13_003|#]] == 여담 == * 이 전투에서 전사한 [[슈무루 양구리|양구리]]는 청의 개국공신 중의 한 명으로 14세부터 [[천명제|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하고 누르하치의 사위가 된 용맹한 돌격대장이었다. 당시 직위는 초품 일등공으로 다른 문무대신보다 훨씬 높은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청나라에 항복하여 왕으로 봉작된 한족 3왕(공유덕, 경중명, 상가희)보다 훨씬 높은 직위였다. 전사한 양구리의 시신을 마주친 [[숭덕제|홍타이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애통해했다고 청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 양구리와 함께 이 전투에 참가했던 도도는 훗날 죄를 짓고[* 군사작전 중에 병영으로 창기를 불러들였다.] 이 일까지 재차 거론되어 친왕에서 버일러로 강등되었으며, 벌금 1만냥과 소유한 노비 3분의 1을 친형인 호쇼이 머르건 친왕 [[도르곤]]에게 바치라는 벌을 받았다 전한다. 그래도 홍타이지가 조선 침공 때 자신보다 앞서 압록강을 건너는 선봉부대를 맡겼을 만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송산-금주 전투에서 [[홍승주]]를 생포한 공으로 군왕작을 회복했고, 입관 때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북경에서 쫓아내는 공을 세워 친왕작을 회복했으며, 도르곤의 오른팔로서 남명 홍광제 정권 함락 및 양주대학살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천연두로 요절했다. 사후에 다시 군왕으로 강등되었으나, 건륭 연간에 도르곤을 친왕으로 복권하며 도도 역시 친왕으로 복권되어 태묘에 배향되었다. * 이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김준룡은 한때 부족한 정보로 인해 "김준룡이 앞장서 퇴각했기 때문에 예하 군대가 흩어졌다"는 이유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으로 유배되었지만 이후 이조판서 [[지천 최명길]]과 [[비변사]]가 올린 계(啓)로 자세한 정황이 알려지고, 전라도 근왕병이 광교산에 제 시간에 도착했음이 참작되어[* [[강진 전라병영성]]에서 [[광교산]]까지는 통상 9일이 걸리는데, 김준룡의 전라도 근왕군은 교지를 받은지 13일되는 시점에서 이미 광교산에 도착해 진영을 꾸렸으니 기일이 늦지 않았다는 것.] 사면되었다. 이후 김준룡은 어영중군, [[병마절도사|경상도병마사]] 등을 역임했고, 훗날 정조로부터 김준룡은 충양(忠襄)이란 시호를 받았다. * [[수원화성]]이 축조될 때에서야 [[채제공]][* 화성의 건축을 위해 석재를 구하던 인부들에 의해 전해들었다고 한다.]에 의해 전승터인 광교산에 전승비가 새겨져 기려지게 되었다.[*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소재.] * 2023년 현재 이 지역은 수원시 [[장안구]]와 [[광교신도시]]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여담으로 근방에 [[세종대왕]]의 장인, [[소헌왕후]]의 아버지이자 [[문종]], [[세조]]의 외조부인 [[심온]]의 묘소가 있다. [각주] [[분류:병자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