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왕릉)] [include(틀:역대 조선 국왕 관련 문서)] [[파일:남양주_광릉_정자각 문화재청.jpg]] 光陵 [목차] == 개요 == 광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조선]] [[세조(조선)|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으로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 [[파일:external/plug.hani.co.kr/48141_2943_4.jpg]] 광릉 능역에 들어갔을때, 능역 왼쪽에 있는 무덤이 세조의 능이고,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 역사 == [[파일:광릉 1915.jpg]] 1915년도에 촬영된 광릉의 모습. 비각 앞(정자각 우측)에 수복방(왕릉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이 보이는데, 그 이후 소실되어서 없는 채로 있다가 2017년에 복원하였다. 정자각 좌측에도 수라간이 있었는데, 역시 소실되었다가 2017년에 복원하였다.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조성할 때 죽을 때 빨리 썩어야 하니 석곽과 묘실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3828366|자신에게 큰 돈을 쓰지 말고 간소하게 능을 조성하라]]는 뜻에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정확히는 석실 형태의 석곽을 만든 후 안에 관을 집어넣는 이전의 [[조선왕릉]]과 달리 세조는 [[회곽묘]] 형태로 관이 들어갈 구덩이만 석회로 다진 회곽에 안장했는데, 역설적으로 석회가 주성분인 삼물(三物·석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2 : 1 : 1로 섞은 것)이 돌처럼 굳어 방수 기능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회곽에 안치된 시신은 석곽에서보다 천천히 썩는다. 그걸 넘어서 사실상 안 썩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http://weekly.donga.com/List/3/all/11/92307/1|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서 미라가 대거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에는 왕릉 건축과 조성 과정에서 엄청난 돈과 백성들의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는데 세조가 부역 인원과 조성 비용을 절반 이상 감축하게 한 것이다. 그 외에도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시신이 빨리 흙이 되어야 좋다고 생각한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광릉은 평소 왕릉 조성 비용의 절반 남짓으로 묘역이 조성되었고, 덕분에 왕릉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광릉은 조선 왕조는 물론 조선 장례 문화 변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후의 왕릉 조성에도 큰 모범이 되었다. 조선의 관혼상제 예법을 적시한 주자가례에도 장례 방식이 회곽묘로 되어있으나, 정작 회곽 묘의 원산인 중국에선 회곽묘가 흔하지 않다. 반면 조선은 사대부의 상당수가 회곽묘다. 1483년 그의 정실 [[정희왕후]] 윤씨도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묻혔다. 원래는 정창손의 조부인 정흠지의 묘가 있었으나 이장시켰다. 원래 정해진 능호(陵號)는 지금의 이름인 광릉이 아닌, '''태릉(泰陵)'''이었다.[* 사실 경릉(景陵)·창릉(昌陵)·정릉(靖陵)이 능호 후보였어서 태릉 또한 후보에 없었다.] 그러다 [[예종(조선)|예종]]이 태릉을 제시했는데 [[신숙주]]가 재논의 과정에서 태릉은 암군이자 후대의 평가가 좋지 않은 [[현종(당)|당 현종]]의 능호와 똑같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결국 '''광릉(光陵)'''으로 정해진다. 이 '''태릉(泰陵)'''이란 능호는 나중에 [[문정왕후]]의 능호가 된다. == 형식 == [[파일:광릉.jpg]] 하늘에서 바라본 광릉의 모습. 왼쪽이 세조릉, 오른쪽이 정희왕후릉. 하나의 정자각을 사이에 두고 완벽한 V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왕릉의 형식 중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효시이다.[*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조선)|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동구릉|현릉(顯陵)]] 역시 동원이강릉인데, 광릉은 정희왕후가 승하한 후인 1483년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되었고, 현릉은 처음에는 문종만 묻혀 있는 단릉이었다가 중종 대인 1512년에 현덕왕후를 같이 모심으로써 동원이강릉으로 조성이 되었다. 즉, 광릉이 현릉보다 조성된 시점이 빠르다.] 즉, 하나의 정자각을 가운데에 두고, 정자각 뒤편의 2개의 언덕에 각각 능을 구성하는 형식으로서 보통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좌측이 왕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무덤이다. 이 법도를 벗어난 무덤으로는 조선 왕조의 추존 왕인 [[의경세자|덕종]]과 [[소혜왕후]]가 묻혀 있는 경릉(敬陵)이 있다. == 외부 링크 == *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11&mn=RT_01_02_01|문화재청 홈페이지: 남양주 광릉]]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4862&cid=40942&categoryId=33539|두산백과: 광릉]] *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B%A6%89|한국어 위키백과: 광릉]]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4206&cid=46622&categoryId=46622|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양주 광릉]] == 같이보기 == * [[봉선사]] * [[국립수목원]]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세조(조선), version=459)] [[분류:조선왕릉]][[분류:남양주시의 문화재]][[분류:경기도의 무덤]][[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세조(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