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원래 광통교 자리에 신설된 다리, rd1=광교(청계천))] ---- [include(틀:청계천의 교량)]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통교.png|width=100%]]}}} || || {{{#fff ''' 광통교[*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331104610000#|사진 출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L6oDVrFrefQ)]}}}|| || {{{#fff '''광통교 소개 영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1 廣通橋 / Gwangtonggyo}}} [[청계천]]의 [[교량|다리]]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한양도성|도성]] 내 주요 도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였다.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청계천의 2번째 다리다. == 이름 == '광통교(廣通橋)'는 '광통방(廣通坊)의 다리(橋)'란 뜻이다. 이외에 줄임말인 '[[광교(청계천)|광교]](廣橋)'를 비롯하여 '대광통교(大廣通橋)', '북광통교(北廣通橋)', '광충교(廣沖橋)'란 이름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광교'로 많이 불렀다. 이중 대광통교와 북광통교의 경우, [[청계천]]의 지류인 창동천[* 倉洞川. [[남산(서울)|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계속 흘러 무교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던 개천이다. 이름은 근처에 있던 선혜청의 곡물창고에서 유래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063|출처]]]에 놓인 같은 이름의 다리와 비교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남대문로1가 23번지 일대에 놓였다.] 청계천은 창동천보다 북쪽에 있었고, 다리 역시 창동천의 광통교보다 규모가 컸기에 북광통교, 대광통교라 불린 것이다. == 위치 == 원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와 [[중구(서울)|중구]] [[남대문로]]를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35 (서린동)와 중구 청계천로 30 (다동) 사이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래 [[광통교#s-4|역사]] 단락으로. == 역사 == [[태조(조선)|조선 태조]] 때 창건했으며 원래는 [[흙]]으로 만든 다리였다. 이후 1410년([[태종(조선)|태종]] 10년)에 [[홍수]]로 무너지자 돌다리로 고쳐지었다. 이 때 다리 건설에 사용한 돌들은 [[태종(조선)|태종]]의 [[계모]] [[신덕왕후]]가 묻혔던 [[정릉(서울 성북)|정릉]]에서 가져왔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08008_001|#]] 이는 신덕왕후에게 원한을 가졌던 태종의 복수의 일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정릉에 쓰인 돌들은 무사하여 현대까지 [[여말선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한성부|한성]]의 큰 길인 육조거리([[세종로]])와 운종가([[종로]]), 그리고 [[숭례문]]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광통교 일대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한성의 최대 [[번화가]]가 되었다. 다리 주변에 여러 수공업 작업장들이 들어섰고 큰 [[재래시장]]들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거지]]들도 이 근처에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사실 번화가는 거지들에게는 좋은 곳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그만큼 동냥 받을 확률도 높아지니까.] 후대 임금들도 광통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단 [[왕]]이 [[숭례문]]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용하던 다리였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다리인 만큼 임금 자신이 백성들을 생각한다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이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격쟁]]도 많이 열렸고,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는 곳이 되기도 했다. 1760년([[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할 때 영조가 직접 나와 이곳에서 공사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 다리의 기초 부분을 고쳐짓고 [[난간]]을 수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5001_002|#]] 이후 큰 변화없이 있다가 1899년([[광무]] 3년) [[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서울 전차|전차노선]]이 생기면서 다리 동편에 전차선로가 깔렸다. 1910년 8월에 이 노선이 복선화되면서, 다리는 1m 정도의 [[콘크리트]] 선로 밑에 묻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53년 광통교.png|width=100%]]}}} || || {{{#fff ''' 1953년 경 광통교 '''}}} || 그러다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도로 밑에 묻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일부 부재들이 [[창덕궁]]과 [[창경궁]], [[탑골공원]]으로 옮겨졌다. [[서울특별시]]에서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 당시에 원 위치에 세우려 했지만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기존 광통교를 서쪽(상류 쪽)으로 150m 가량 옮겨 복원했다. 그리고 원래 광통교 위치에는 [[광교(청계천)|광교]]라는 현대식 다리를 만들었다. 현재 광통교는 사람만 통행이 가능하고 [[차량]]은 불가능하다. == 구조 == * 길이 12.3m, 너비 14.4m, 높이 3.7m로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길이보다 폭이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통교 석물 1.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통교 석물 2.png|width=100%]]}}} || ||<-2> {{{#fff ''' 정동 정릉에서 옮겨 온 광통교 석물[*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atcUrl=keyword&recommendIdx=1557|사진 출처 - 문화재청.]]] '''}}} || 광교 아래로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나마도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어서 끼워넣었다.'''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조선)|태종]]의 반감을[* 정확히는 외척에 대한 반감이었지만. 태종은 [[원경왕후|자신의 처가]]에게도 그렇고 [[소헌왕후|며느리]]의 [[심온|집안]]에 대해서까지 매우 가혹했다.] 조선왕조가 망한 오늘날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유적. 아이러니하게도 광통교 밑에 처박힌 탓에 사람 손을 덜 타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을 수 있었다. [[건원릉]] 석물에서와 같은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 태극 문양 등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에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던 [[도교]], [[불교]] 문화의 잔재를 느낄 수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통교 구조물.png|width=100%]]}}} || ||<-2> {{{#fff ''' 광통교 남쪽으로 인도를 덧댄 모습 '''}}} || 복원한 [[청계천]] 너비와 광통교 길이가 맞지 않아서, 광통교 남쪽으로 인도를 덧대었다. 인도 난간은 정릉 석물을 본딴 형태이다. 이 덧댄 인도 밑으로 청계천 물이 흘러가며, 광통교 본교 밑바닥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돌이 깔려 있다. == 교통 == === 지하철 === *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도보 6분) *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3번 출구 (도보 8분) *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 (도보 9분) === 버스 === * [[https://place.map.kakao.com/15163099|이 곳]]으로. == 여담 == * [[조선시대]]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백성들이 [[교량|다리]]를 밟는 '답교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1년 내내 다리가 건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성부|한양]]의 주민들은 먼저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청계천]]의 다리 위를 왔다갔다 했는데,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통교와 [[수표교]]로 갔다고 한다. 이 답교놀이는 조선 멸망 이후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1970년에 복원되었고 2009년 3월 5일에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받았다.[[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221100400000#|#]] * 하루는 [[성종(조선)|성종]] 임금이 [[잠행]]하다 광통교를 지날 때, 다리 밑에서 묵으려던 한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내는 "[[경상도]] [[포항시|흥해]][*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일대.]에서 올라온 숯장수 김희동입니다. 임금님이 어질다 하여 죽기 전 꼭 뵙고자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을 뵈면 [[해삼]]과 [[전복]]도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고 했다. 이에 흐뭇했던 성종은 자신을 이 첨지라 소개한 뒤 왕을 꼭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따라온 [[별감]]에게 귀띔한 뒤 별감의 집으로 김희동을 데려갔다. 다음날 성종은 김희동에게 "왕을 만나려면 벼슬이 있어야 하니 원하는 벼슬이 있으면 말해보라" 했다. 김희동은 당황했지만 자기 고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충의라는 벼슬을 이야기했다. 사실 김희동은 이 때 반신반의 했는데 그 다음날 정말로 충의초사(忠義初仕)란 벼슬이 내려져 김희동은 궁으로 들어갔다. 가니 자신이 알고 있던 이 첨지가 바로 그렇게 보고싶던 임금이었다. 김희동은 심하게 놀라 갖고 온 해삼과 전복을 땅에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나 성종은 마음을 갸륵히 여겨 그것을 [[수라|수라상]]에 올리라고 명했다. [[성군]]인 [[임금]]과 그 임금을 생각한 [[백성]]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 [[김두한]]이 [[심영(배우)|심영]]을 실제로 쏜 곳이다. 정확하게는 이설 전의 광통교로, 지금의 신설 광교 자리.[* 이외에도 드라마 〈[[동양극장]]〉과 〈[[야인시대]]〉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동양극장〉에서는 고증에는 충실하게 다루었지만, 〈야인시대〉에서 각색된 부분이 많다. 한 예로, [[심영(야인시대)|심영]]이 사건 발생 때 공연하던 극장은 [[중앙극장]]이 아닌 현재 명동예술극장인 명치좌(明治座, 메이지자)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BMDPMS6p8Gw|실제 김두한의 증언을 심영물에 합성한 영상.]]] [[청계천]]이 바로 [[종로구]]와 [[중구(서울)|중구]]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하천이고, 광통교는 그 청계천 위에 있기에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종로도 아니고 중구도 아닌'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관할]] 구역의 모호함을 이유로 종로구 경찰과 중구 경찰이 서로 책임소재를 떠넘기기에 충분했고, 이 때문에 수사가 지체될 것을 일부러 노리고 이 다리에서 쏜 것이다.[* 다만 지적도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광교는 거의 전부가 [[중구(서울)|중구]]에 속하며, 광교 북단이 [[종로구]]와의 경계를 이룬다. 따라서 광교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날 경우 [[서울남대문경찰서]]가 책임지고 수사해야 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통교 축소 모형.png|width=100%]]}}} || || {{{#fff ''' 신한은행 광교영업부 사옥 한 켠에 있는 광통교 모형[* [[https://map.naver.com/v5/search/%EC%8B%A0%ED%95%9C%EC%9D%80%ED%96%89%20%EC%B2%AD%EA%B3%84%EC%B2%9C?c=14135469.6780496,4518679.1909766,17,0,0,3,dha&p=QprRw3CHqfty7S4kLYlXJg,-149.7,-4.36,37,Float|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 || 1994년 초에 [[조흥은행]]에서 옛 광통교 자리(현재 [[광교(청계천)|광교]] 자리) 바로 앞에 있는 본사 사옥 한 켠에 광통교 모형을 실제 크기보다 4분의 1로 축소한 크기로 만들어 설치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852561#home|#]] 이 모형은 2005년에 실제 광통교가 복원된 후에도, 2006년에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으로 흡수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남아있다. * 2016년부터 매년 4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매주 주말마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서울밤도깨비야시장 - 청계천 타임투어마켓]]〉이 열린다. 전통의 흔적이 묻어나는 장소를 살려 한국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컨셉이 특징이다. 매주 토요일은 오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요일은 오후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s://www.bamdokkaebi.org/cgc-introduce|사이트]]로 이동할 것.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광교, version=28, paragraph=1)] [[분류:조선/건축]][[분류:청계천의 교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