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구상,version=11)] [[파일:external/sstatic.naver.net/20141105171749961.jpg|width=150]] 具常 [[1919년]] [[9월 16일]]~[[2004년]] [[5월 11일]] (향년 84세) [목차] == 소개 == [[대한민국]]의 전 [[시인(문학)|시인]]이다. [[본명]]은 [[구상준]](具常浚)[* 이 이름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이며 [[본관]]은 [[능성 구씨]][* 항렬자를 쓰지 않지만 [[http://www.neungsungkoo.com/htmls/jongbo/157.pdf|능성구씨종보 제157호]]에 전 대종회 고문이라고 써져 있으며, 27세손 자(滋)자 항렬을 쓴 [[야구선수]] [[구자욱]](具滋昱)이 종증손(從曾孫, 자기 형제의 증손자.)이라고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30501032839000001|문화일보 기사]]에 써져 있다. 그러므로 구상은 24세손이다.]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 생애 == [[1919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642번지에서 아버지 구종진(具鍾震)과 어머니 [[아산 이씨]] 이정자(李貞子)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은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에서 보냈다. 50세 아버지와 44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만득’이란 [[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러 [[남매]]를 다 잃고 일곱 살 위 형 [[https://www.newtonosb.org/%EC%8B%9C%EB%B3%B5%EC%8B%9C%EC%84%B1-%EB%8C%80%EC%83%81%EC%9E%90-%EC%95%BD%EC%A0%84-2-%EA%B5%AC%EB%8C%80%EC%A4%80-%EA%B0%80%EB%B8%8C%EB%A6%AC%EC%97%98-%EC%8B%A0%EB%B6%80|구대준]](具大浚) 하나 뿐 이었던 집안의 막둥이 아들은 불면 꺼질세라 [[금지옥엽]]으로 길러졌다. 시인의 어머니는 한문 고전과 평민 소설, 시조를 두루 섭렵한 고전적인 인텔리로, 그가 네 살이 되자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로부터 [[동몽선습]], [[명심보감]], 고시조, [[옥루몽]], [[삼국지연의]] 등을 배운 시인은 그 영향으로 보통학교 시절 조선어와 작문과 화법시간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 살아온 시인은 열다섯 살에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지만, 3년 만에 중도 포기한다. 그와 달리 형 구대준은 끝까지 신학교를 다녀서 신부 서품을 받았다. 이후 도쿄로 밀항해 [[니혼대학]] 종교과에 입학했는데, 이 때 [[학점]]을 받기 위해 습득한 [[불교]] 지식이 평생 시인을 받쳐줄 마음 속 깊은 자양분이 되었다.[* 윤정구,『한국현대시인을 찾아서』,「존재의 비의를 캐는 묵상의 시」,국학자료원, 2000, pp.26-30.] 이처럼 구상 시인의 시세계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고전문학과 집안의 [[가톨릭]]적 분위기, 대학 시절 배운 불교 지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에 게재한「길」, 「여명도」등이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자 월남하였다. 6·25 전쟁 때는 종군작가단 부단장을 지냈다.[* 최동호, 『한국 현대 시사의 감각』,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p.63.] [[2004년]] [[5월 11일]]에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 == 시집 == 시집으로 『구상시집』(1951), 『초토의 시』(1956), 『까마귀』(1981), 『구상 연작 시집』(1985), 『유치찬란』(1989) 등과 자선 시집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984)를 냈으며 『구상 시 전집』(1986)을 간행했다. == 대표작 「초토의 시」 == <서울시 문화상>을 받은 15편의 연작시다. 이를 통해 구상은 전쟁에 의해 초토화된 조국을 노래했다. 8번째 작품 [[적군의 묘지 앞에서|적군 묘지 앞에서]]가 잘 알려져 있다. >조국아, 심청이 마냥 슬프기만 한 너로구나. >시인아 너의 이름을 부를 양이면 목이 멘다. >저기 모두 세기의 백정들 >도마 위에 오른 고기모양 너를 난도질하려는데 >하늘은 왜 이다지도 무심만하더냐. > >조국아, 거리엔 희망도 절망도 못하는 >백성들이 나날이 환장해만 가고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은 >너를 또다시 두 동강을 내려는데 >너는 오직 생각하며 쓰러져 가는 갈대더냐(후략) >---- >'초토의 시 10 - 휴전 협상 때' 중 ‘세기의 백정들’과 ‘너의 원수와 그 원수를 기르는 벗들’ 은 조국과 민족을 분단시키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었던 자들이다. 난도질당하려는 조국의 운명을 목이 메어 부르는 시인의 고조된 외침은 우리 민족 모두의 외침으로서 절박함이 배어 있다.[* 최동호, 『한국 현대 시사의 감각』,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p.64.] == 시세계 == 시인은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하는데, 그 고발이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건국 신화, 한자 문화권의 전통 교양, 자연 탐구는 물론 선불교적 명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이운룡은 구상의 시를 두고 “진리의 모색이며 그 기록으로써 종교·존재·역사에 대한 비평이고 인간 전체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온유”라고 칭하며 극찬했다.[* 문덕수 외, 『한국현대시인연구 下』,「현존과 영원에의 조응」, 푸른사상, 2001, p.282.] 시인은 스스로 “나의 시를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고들 하는데, 오늘의 현상학을 영원 속에서 조명코자 한다고 할까, 오늘과 영원을 조응시켜, 존재 자체 안의 신비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나의 문학관이라면 문학관이지”라며 자신의 시세계를 정리한 바 있다. == 여담 == 프로야구 선수인 [[삼성 라이온즈]]의 [[구자욱]]이 친형의 증손자(종증손)이다 .실제로 구자욱의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실제로 [[구자욱]]은 어릴 때는 서울에 올라가서 자주 뵙기도 하고, 학교에서 학생들 읽으라고 걸어놓은 시가 종증조부의 시라서 놀라기도 했다는 일화가 드러나기도 했다. 서양화가 [[이중섭]]과 친한 친구였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릴 때 그를 도와주기 위해 삽화를 그리는 직장을 알선해 주기도 했다.[* [[고은]]의 글로 이중섭이 삽화 그리기를 거절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미술사학자 최열이 밝혀낸 바로는 실제로 삽화를 그린 적 있다. 1952년 10월 《문학예술》 김이석의 소설에 이중섭의 삽화가 남아 있다.] 이후로도 2번째 개인전을 열게 도와 주었고, 1956년에 [[이중섭]]이 타계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도 치렀다. 이중섭이 죽은 해에 구상이 발표한 대표작인 "초토의 시" 연작 중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시가 한 편 있다. 한편 이중섭의 작품들 중에 구상의 가족을 그린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www.sjpost.co.kr%2Fnews%2FarticleView.html%3Fidxno%3D65653&psig=AOvVaw0Kyfae14aM1X68-Q_AuNnq&ust=1686947654747000&source=images&cd=vfe&ved=2ahUKEwjWyf_uj8b_AhXDg1YBHS8tBI0Qr4kDegQIARBA|시인 구상의 가족]]" 이란 작품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6.25 전쟁]] 때 구상은 [[종군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장의 소개로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구상 스스로가 '의기투합'이라고 표현할 만큼 둘이 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격의없이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둘이 얼마나 친했는지 구상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박첨지'라고 부를 수 있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때에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지지했는데, [[쿠데타]] 이전 한 달 가량 박정희는 신변 안전을 위해 구상의 집에 숨어지내기도 했다. 다만, 쿠데타 성공 이후 박정희가 정계 진출을 권하자, 구상은 '남산골 샌님으로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리고는 [[경향신문]]의 도쿄지국장 자리를 맡아 [[196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지냈다. 다만, 박정희 정권에 맹목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은 아니어서,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품을 쓰기도 했고 이 때문에 [[필화]]를 겪기도 했다. 문인간첩단 사건[* 1974년 월간지 '한양'에 참여했던 [[이호철(소설가)|이호철]], 김우종, 정을병, 장병희, 임헌영 등 문인 다섯 명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한 사건이다. '한양'은 1970년대에 유신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재일동포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잡지로, 국내 문인들도 원고료를 받고 글을 싣고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모윤숙]], [[박종화]], 조연현 등도 이 잡지에 투고했고, 구상 또한 '한양'의 한국총판을 맡아국내 보급 업무를 담당했다. 대학가와 문단을 중심으로 유신 체제 반대 움직임이 커지자, 본보기로 문인 몇 명을 잡아넣기 위해 보안사령부가 혐의를 조작한 것.] 때에는 속임수까지 써 가면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문인들을 위해 증언대에 서기도 했다.[* [[증인]]으로 나간다고 하면 박정희 대통령도 탐탁잖아 하고, 정부 기관에서도 만류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구상은 증인 채택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증인에 나갈 의향이 없는 척 하다가 재판 당일에 법정에 나타나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사실 구상 자신도 [[이승만]] 정권 시절에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언론운동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누명을 쓰고 구속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1979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후 자신이 다니던 성당에 5년 내내 연미사(위령 미사)를 넣었다고 하니, 적어도 친구로서 정은 두터웠던 모양.[* 박정희와 구상의 인연에 대해서는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24|이 기사]]를 참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구상은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 위원, 민정당 총재 고문, 민정당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6.25 전쟁]] 이후 [[왜관읍]]에 정착하여 1974년에 서울 영등포로 [[이사]]가기 전까지 왜관에서 살았었다.]에 구상문학관이 있다. [[http://kusang.chilgok.go.kr/main| 홈페이지]] 문학관이 있는 만큼 문학관 주변 도로명주소는 구상길이다. 나름 집필실인 '관수재'도 복원되어 있긴 하지만 외관만 볼 수 있을 뿐, 항상 잠겨 있어서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 그런데 그가 [[왜관읍]]에 살긴 했지만 [[영남일보]] 편집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하와이 대학교]]에서 강의 활동을 하며 타지 생활을 더 오래 했다. (...) 그래서 그가 [[왜관읍]]에 살던 시기에, 칠곡군이나 [[왜관읍]]과 관련하여 쓴 작품은 전무하다. 한편, 구상 시인을 기리는 '구상문학상'이나 '구상한강[[백일장]]'은 서울 [[영등포구]][* 1974년 이후 30여년 간 살았던 곳이다.]에서 한다.(...) 문학관보다 먼저 거행되었다. >동이 트는 하늘에 >가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 >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를 날려. > >말굽소리. >말굽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를 띄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1946년 발표한 '여명도'라는 위의 시가 월남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당시 김일성이 이 시를 '퇴폐적, 세기말적, 반동적, 감상주의'라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곧이어 어용작가들이 구상 시인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심지어 위 시가 실려있는 책 '응향'을 금서로 지정해버린다. 이미 김일성의 눈 밖에 난 뒤라 계속 북한에 잔류했다면 말로가 썩 좋진 못했을 것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1919년 출생]][[분류:2004년 사망]][[분류:능성 구씨]][[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금관문화훈장]][[분류:니혼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