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인왕사_국사당_측면_(촬영년도___2015년) 문화재청.jpg|width=600]] [목차] == 소개 ==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仁王山國師堂). 한국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는 데 편하도록 민가와 좀 떨어진 곳에 짓는 [[굿당]] 중 하나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1973년 7월 16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사당을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역사 == [[파일:external/www.cha.go.kr/h0028000011003.jpg|width=500]] 국사당의 [[신목]]. 인왕산 국사당의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건축 양식이나, 진열하고 있는 무신도의 신격, [[조선왕조실록]]에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목멱신사(木覓神祠)에 관련된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국사당은 서울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얘기에는 이성계가 젊었을때 비가 내려 노모와 딸이 사는 한 허름한 집에 잠시 신세를 졌다. 잠을 자는데 대들보 세개가 등에 얹히는(무학대사가 해몽해준 그 꿈)꿈을 꾸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그 꿈을 듣고 왕이 될 것이라는 해몽을 해주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자고 있던 딸이 그것을 듣고 깨 이 손님이 왕이 되냐고 떠들었다. 당황한 이성계에게 노파가 딸의 뺨을 때리라 시켰고 이성계는 엉겁결에 따귀를 쳤는데 딸은 죽고 말았다. 그리고 노모가 하는 말이 액땜했으니 오늘 일은 발설하지 말라며 내보냈다. 훗날 이성계가 그 집을 찾아보니 흔적도 없었고, 노모와 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게 지금의 국사당이라고 한다. 출처: 이경재 저 가람기획(2002년) <청계천은 살아있다>에서 발췌함.] 앞면 3칸, 옆면 2칸이고 양끝의 2칸은 이곳으로 이전한 후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며, 이전 당시 원래 사용하던 자재들을 그대로 가져와 건축하였다. == 모시는 신들 == 국사당에 모셔진 신들은 다음과 같다. * [[단군]] * [[태조(조선)|태조 이성계]] * [[칠성신]] * [[신장]][* [[최영]]이라는 주장이 있다.] * [[별상신]][* [[천연두]]를 옮기는 신.] * [[호구아씨]][* 역시 천연두와 관련된 신.] * [[곽곽선생]][* 점술과 관련된 신이다.] * [[창부]][* 예능의 신.] * [[명성황후 민씨|민중전]] * [[산신령]] == 내부 모습 == [[파일:external/www.cha.go.kr/h0028000011004.jpg|width=500]] 국사당의 내부 모습. 내부의 [[단청]]은 단청 중 가장 화려한 금단청으로, 조선시대에는 유교 건물에서는 검소함을 추구했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고[* 다소 예외적인 경우로는 [[환구단]]이 있다. 여기 단청은 유교 건축물치고는 다소 화려한 편.] 사찰같은 종교건물 위주로 사용했던 단청이다. 한국전쟁의 화마에 여러 사찰들이 휘말려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금단청이 쓰인 건물은 많지 않다. 인왕산 국사당은 몇 안되는 금단청이 남아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 기타 정보 == 국사당은 [[무당]]개인이 운영하는 신당이 아니라 관리자인 당주(堂主)가 따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유료로 빌려주는 [[굿당]]이며, 일반 개인도 [[절(불교)|절]]처럼 개인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근처 환경이 환경이니만큼 주변에 암자와 절, 교회가 잔뜩 섞여 있지만 역사적 상황 때문인지 이렇다 할 종교문제가 터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일단 장소가 여느 산사처럼 산, 그것도 군사보호지역(90년대에 상당 부분 해제됨)과 그린벨트로 둘러싸여 있어서, 주위에 민가, 교회나 종교시설이 없으니 부딫칠 일이 없다.[* 반면에 이태원의 부군당은 기독교인이 토지를 매입해 바로 옆에 교회가 들어왔다. 물론 이 경우도 다행히 별 사고는 없다. 여담으로 역사적으로 이쪽도 영 일제랑 안좋은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순사들이 말을 타고 앞을 그냥 지나다니면 사고가 생겨 함부로 못 건드렸다고 한다. (민속원 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참조)] [[사직공원(서울)|사직공원]] 쪽 인왕스카이웨이와 인접해 있으며, 등산로로 2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외관으로도 굿이 있는 날이 아니면 절, 암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 무속 연구자들은 이 인왕산 국사당을 이슬람의 [[메카]]나 일본의 [[이세 신궁]]마냥 한국 무속신앙의 중심지인 것 마냥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조성제와 최준식.] 우리나라의 무속은 [[이슬람]]이나 [[신토]]처럼 국가 주도하에 하나의 단일 교단 형태로 통일된 적이 없다. [* 국가의 종교로 지정된 적이 없다. 불교 도래 이전에는 그랬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 체계자체와 융합된 제정일치 사회라 후대의 유교(조선), 불교(삼국, 고려)처럼 국가 사상이나 국교로 셤겨진 것은 아니다.] 과거 나라에서 특정 지역의 명산대천에 직위를 내린 것도 어디까지나 나라를 지켜달라는 주술적인 의미와 민심의 위무 차원일 뿐 특별히 국가 주도로 무속신앙의 교리나 교단을 정비하고 각 지방신의 위격을 일일이 구분해 모든 지역에 통일시키거나 한 적은 없기에 한국 무속의 중심지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무속신앙 내에서 자체적으로 각 지역의 유명한 명산대천이나 기도터의 품계를 나누는 것은 있었다.][* 이슬람이나 신토의 제정일치적 컨셉에 대응하는 시설로써 [[종묘]]와 [[환구단]]을 꼽을 수는 있지만, 무교(巫敎)와는 전혀 상관없다.] 조선시대의 국가 종교(사상)은 어디까지나 유교였고, 매우 공고하였다. 하지만 무속 연구가들이 그걸 몰라서 무속신앙의 중심지인 것처럼 주장하는 게 아니고, 국사당은 국가에서 인정하고 제사를 지내는 수호신사이며 수도 한양에 위치해있다는 상징성 때문에 무속신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단 그 규모와 역사는 무속 시설 시설 중에서는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니, 그것이 기준이라면 틀린 얘기만은 아니다. [[분류:한국 신화/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