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광해군의 후궁[br]{{{+1 귀인 홍씨 | 貴人 洪氏}}}'''}}} || ||<|2> '''출생''' ||[[1601년]][*출처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 || ||[[조선]] [[충청도]] [[홍성군|홍주목]][br](現 [[충청남도]] [[홍성군]]) || ||<|2> '''사망''' ||연대 미상 || ||[[조선]] [[충청도]] [[보령시|보령군]] 유배지 사저[br](現 [[충청남도]] [[보령시]] 일대) || || '''능묘''' ||미상 ||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숙의}}}''' || ||[[1617년]] [[9월 7일]] ~ [[1618년]] [[8월 27일]] || ||'''{{{#ffd400 조선 소의}}}''' || ||[[1618년]] [[8월 27일]] ~ [[1622년]] 이전 || ||'''{{{#ffd400 조선 귀인}}}''' || ||[[1622년]] 이전 ~ [[1623년]] [[4월 1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풍산 홍씨]] || || '''부모''' ||부친 홍매(洪邁)[br]모친 [[이천 서씨]] || || '''배우자''' ||[[광해군]] || || '''봉작''' ||숙의(淑儀) → 소의(昭儀) → '''귀인(貴人)'''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광해군]]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홍주 목사[* 홍주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조선시대에는 홍주목(洪州牧)이라고 하였다. ]를 지낸 홍매(洪邁)이며, 어머니는 [[이천 서씨]] 서극홍(徐克弘)[* [[서희]]의 직계 후손(16대손)이다.]의 딸이다. 광해군의 후궁이 되면서 집안이 혜택을 누렸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출되어 [[보령]]에 [[유배]]되었다. 그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 생애 == 1617년(광해 9) 후궁 간택에서 [[귀인 윤씨|윤홍업의 딸]]과 함께 선발되어 숙의(淑儀)로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8008_001|봉작되었다.]] 본래 [[내명부]]의 예법에 따르면 숙의는 세 명만을 둘 수 있는데, 광해군은 홍씨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나 두어서 비판받았다. 또한 여러 후궁의 일족들이 관직에 제수되고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홍씨는 이듬해인 1618년(광해군 10년)에 소의(昭儀)로 품계가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007008_006|올랐으며,]] 이후 귀인(貴人)으로 한 단계 더 승격되었다.[*A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 정확한 진급 시기는 미상이나 1622년(광해군 14년)에 귀인으로 칭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에 귀인에 봉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귀인 홍씨의 아버지 홍매는 [[고양시|고양]][[군수]]였다가 딸이 후궁이 되자 연안부사가 되었고, 홍주목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1619년(광해 11년) [[황해도|황연도]](黃延道)[* 1616년(광해군 8년) 황해도를 황연도(黃延道)로 고쳤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도로 황해도가 되었다. ] 순안 어사 한명욱(韓明勖)이 홍매가 [[가렴주구]]를 일삼는다 하여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은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홍매가 세력을 믿고 재물을 탐하여 가는 곳마다 고을을 텅 비게 만들었다고 한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홍매는 [[강릉]]에, 귀인 홍씨는 [[보령]]에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다. [[분류: 조선의 후궁]][[분류:1601년 출생]][[분류:풍산 홍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