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시성된 교황]][[분류:교황(동로마 제국)]][[분류:가톨릭 성인]][[분류:시리아인 교황]][[분류:741년 사망]][[분류:8세기 교황]][[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 [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90_s_gregorio_III.png|height=125]] || || 제89대 [[그레고리오 2세|성 그레고리오 2세]] || → ||<#806600> '''{{{#FFF 제90대 성 그레고리오 3세}}}''' || → || 제91대 [[자카리아|성 자카리아]] || * [[라틴어]]: Gregorius III * [[이탈리아어]]: Gregorio III * [[영어]]: Pope Gregory III * 생몰년: ?~741 * 재위기간: 731년 3월 18일 ~ 741년 11월 28일 (10년 8개월 10일) [목차] == 개요 == 제90대 [[교황]]. 6번째 [[시리아]] 출신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2013년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교황)|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하기 전까지 마지막 비유럽권 출신 교황이었다. == 생애 == [[기독교]] 성상을 파괴하는 문제로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와 재위 내내 엄청난 갈등을 경험했는데, 레온 3세는 교황의 '불복종'에 대한 보복조치로 새로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오 3세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와 대립각을 세운 전임 교황의 이름을 딴 새 교황도 순순히 복종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황제에게 대항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교황은 지역 공의회를 소집해, 누구든지 황제의 칙령에 따라 [[성상(조형물)|성상]]을 파괴하는 자는 [[파문]]에 처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황제와의 대결 태세를 분명히 하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군대를 남이탈리아에 주둔시켜 [[세금]]을 징수하고 교회 행정에도 간섭하고 있어 주민들의 탄원이 교황에게 빗발치고 있었다. 이에 교황은 여러 차례 사절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황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지만 레온 3세는 자신과 대립각을 세우는 교황과 화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사절들을 오는 족족 투옥시켰다. 게다가 교황이 공의회를 통해 결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일리리쿰(현재의 [[크로아티아]])과 [[시칠리아]], 남이탈리아를 로마 교황의 관할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할로 변경시켰는데 이 조치로 로마 교회의 교세(敎勢)와 각종 조세 수입이 감소하게 되어 교황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교황과 황제의 갈등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롬바르드족이 다시 반기를 들어 교황을 압박하여 그레고리오 3세의 입지도 위태로워졌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프랑스]]에 침입한 [[아랍]]군을 막느라 바빴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롬바르드족과 협력해 아랍군을 막아야 하는 처지라 이를 무시하였다.[* 결국 카롤루스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랍군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에서의 전권(傳權)을 오롯이 하게 된다.] 결국 교황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드족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정치적으로 그레고리오 3세는 동로마 제국과 롬바르드족의 압박으로 수세에 몰렸으나 종교적으로는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732년 [[독일]] 주교로 있던 [[보니파시오]]를 대주교로 승진시키고, 몇 년 뒤 교황 대리로 임명해 전권을 위임하였으며, 이를 통해 독일권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이후 [[종교개혁]] 때까지 800년 동안 계속된 독일권 내 교황의 지도적 위치의 초석을 놓았다. 또 735년 [[잉글랜드]]의 요크 교구를 대교구로 승격시키고 지속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종교적 쇄신을 도모하였다. 741년 11월 28일 선종했다.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됐고, 사후 시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