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그리스의 대외전쟁)] [include(틀:오스만 제국의 대외전쟁)] Fausto Zonaro의 "도모코스의 승리" 튀르키예어: 1897 Osmanlı-Yunan Savaşı 1897 오스만르-유난 사와쉬으 그리스어: Ελληνοτουρκικός πόλεμος του 1897 엘리노투르키코스 폴레모스 투 1897(힐리아 옥타코시아 에네닌다 엡타) ||<-3><#C0C0FF><:>{{{+1 '''그리스-오스만 전쟁'''}}} || ||<:><#C0C0FF> '''시기''' ||<-2>1896년 2월 3일 ~ 1897년 12월 4일|||| ||<:><#C0C0FF> '''장소''' ||<-2>그리스 본토, 에피루스, 테살리아, 크레타 섬 || ||<:><#C0C0FF> '''원인''' ||<-2>그리스의 고토회복 의욕 || ||<#C0C0FF> '''교전국''' ||[[오스만 제국]] ||[[그리스 왕국]] || ||<:><#C0C0FF> '''지휘관과 지도자''' ||[[압뒬하미트 2세]] [br] 에뎀 파샤 [br] 아메트 헤프제 파샤 등||<^|1>[[콘스탄티노스 1세]] || ||<:><#C0C0FF> '''피해''' ||672 명 사망 ||1111 명 사망 || ||<:><#C0C0FF> '''결과''' ||<-2>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승리 그리스의 외교적 승리 || [목차] == 개요 == [[파일:Le_petit_journal_1897.jpg]] Le Petit Journal 표지에 실린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그리스-오스만 전쟁 또는 1897년 4월 17일~5월 19일까지 벌어진 전쟁이라 30일 전쟁이라고 불리우는 전쟁으로 1897년에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그리스 왕국이 전쟁을 일으켰으나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였다. == 배경 == 이 전쟁은 [[크레타]] 섬에 대한 [[그리스 왕국]]의 관심이 커지면서 일어났다. 당시 크레타 섬은 오늘의 [[튀르키예]]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무슬림]] 주민과 [[기독교]] 주민들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전쟁 자체는 오스만 제국이 선전포고를 먼저 했으나, 이는 그리스가 오스만 곳곳에 살던 [[그리스인|그리스계]]들의 재통합과 [[고토회복]]([[메갈리 이데아]])을 계속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후손이라며 옛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메갈리 이데아|비롯한 고대 동로마 영토를 모두 되찾는다는]]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가지며 오스만과 여럿차례 전쟁을 벌여왔다. 그리스는 오스만을 쉽게 보았지만, 그리스는 외부 열강들의 지원을 받았을 때, 오스만에게 독립했듯이 그리스의 국력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이 전쟁도 초반부터 그리스에게 꼬이기 시작했다. == 전개 == 4월 17일 선전포고를 오스만 제국이 먼저 하자, 그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7만 5천여명 병력으로 오스만 제국 국경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하룻만인 4월 18일에 벌어진 밀로나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패해 물러났고 [[역관광|연이어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를 넘어와 그리스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5월 들어 오스만 군의 연승으로 그리스는 항구도시 볼로스에서 필사적으로 오스만군을 물리쳤으나 12만에 달하는 오스만군의 공격에 결국 열흘만에 볼로스가 함락당하고 만다. 오스만군이 연승을 거두며 그리스 곳곳으로 쳐들어오자, 그리스는 다급해져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열강에게 지원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전쟁을 끝나게 하겠다는 열강들이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오스만도 당시 온갖 사정으로 영 어려운 상황이라 전쟁을 길게 끌 힘이 없었고 결국, 5월 20일 열강들 중재로 이스탄불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 결말 == 그리스는 전쟁 배상금으로 400만 튀르크 [[리라]]를 내줘야했으며 큰소리치고 전쟁을 일으켰더니만 한달동안 여러 곳이 쑥대밭이 되고 큰 피해를 당해서 그리스 왕국 군주정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그리스 여론과 군대에게 강제 휴전은 치욕적이었고, [[메갈리 이데아]]를 이행할 준비가 되지 않은 국가임을 강조했다. 전쟁을 이기리라 크게 선전하던 국왕 [[요르요스 1세]]는 온갖 욕을 먹고 심지어, 암살까지 겨우 피해야 했다. 더불어,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총사령관]]이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도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후 1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 왕국]]와 여러 동맹을 이뤄 오스만 군을 물리치면서 30일 전쟁 당시 목표로 하던 [[크레타]], [[테살로니카]],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땅을 다시 빼앗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러번에 무리한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했기에 반감도 커졌고 결국 요르요스 1세는 1913년에 알렉산드로스 스히나스가 쏜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만다.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뒤를 이어 [[콘스탄티노스 1세]]로 재위하였지만, 그도 아버지처럼 여러 전쟁을 무리하게 벌인 끝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에 경도되었다가 쫓겨나고 콘스탄티노스 1세의 차남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연합국]]의 지원으로 장남 [[요르요스 2세]]를 제치고 즉위하여 [[연합군]]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에 승리하고 [[트라키아]] 전역과 [[스미르나]]를 오스만과 불가리아에게서 획득하고 [[그러나 이 사진이|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려 하여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할 뻔했으나]] [[원숭이]]에게 물려 패혈증으로 사망해버리고(...) 부친 콘스탄티노스 1세가 다시 즉위하여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계속 밀어붙였다가 끝내 참패하고 퇴위하여 메갈리 이데아는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반면에 승전한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별로 좋은 소득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테살리아]]까지 내려왔으나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점령지들을 도로 뱉어내야했고, 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크레타 섬의 경우 오스만 제국 산하이지만 자치를 누리는 "크레타국"의 형태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크레타국의 총리는 에노시스운동의 거두이자 그리스 민족주의자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였고, 군주는 그리스의 왕자였다. 오스만 제국의 언론들은 내각과 [[압뒬하미트 2세]]를 성토했고, 오스만 제국의 반동정치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오스만 제국의 대외전쟁)] [각주][[분류:오스만 제국의 역사]][[분류:그리스의 역사]][[분류:중동의 전쟁]][[분류:유럽의 전쟁]][[분류:그리스-튀르키예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