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조선의 후궁]][[분류:1425년 출생]]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include(틀:다른 뜻1,other1=다른 뜻, rd1=박은빈)]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세조의 후궁[br]{{{+1 근빈 박씨 | 謹嬪 朴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경기도 양주시 광사동 산 98,너비=100%)]}}} || ||<-2> {{{#ffd400 {{{-2 근빈 박씨묘 위치}}} }}} || || '''출생''' ||[[1425년]] || || '''사망''' ||[[1504년]] 이후 || || '''묘소''' ||[[경기도]] [[양주시]] [[광사동]] 산 98 ||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숙의}}}''' || ||[[1453년]] 이후 ~ [[1468년]] [[10월 16일]] || ||'''{{{#ffd400 조선 귀인}}}''' || ||[[1468년]] [[10월 16일]] ~ [[1483년]] [[7월 28일]] || ||'''{{{#ffd400 조선 근빈}}}''' || ||[[1483년]] [[7월 28일]] ~ [[1504년]] 이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선산 박씨(善山 朴氏) || || '''배우자''' ||[[세조(조선)|세조]] || || '''자녀''' ||'''슬하 2남''' 장남 - [[덕원군]](德源君, {{{-3 1449 ~ 1498}}}) 차남 - [[창원군]](昌原君, {{{-3 1458 ~ 1484}}}) || || '''봉작''' ||숙의(淑儀) → 귀인(貴人) → '''근빈(謹嬪)'''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세조(조선)|세조]]의 후궁. [[정희왕후]]의 인지도에 밀려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조의 후궁 중 유일하게 자식을 낳아서 키운 후궁이다.[* 폐출된 소용 박씨가 자식을 낳은 적이 있으나 조졸하였다. ] 슬하에 [[덕원군]], [[창원군]]을 낳아 2남을 두었다. == 생애 ==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극히 제한적이다. 다만, 장남 [[덕원군]]가 1449년([[세종(조선)|세종]] 31)에 태어났고, 차남 [[창원군]]이 1458년(세조 4)에 태어났으므로 세조가 [[수양대군]]일 때 만나서 측실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계유정난]] 이후에 수양대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종2품 숙의로 봉작되었을 것이다. 1468년 [[예종(조선)|예종]]이 즉위하고 사람들의 품계를 높여주고 상급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숙의 박씨는 귀인으로 올리며" 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9월 22일 무인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009022_003|#]] ] 1483년([[성종(조선)|성종]] 14)에 정1품 빈으로 책봉되어 이때부터 근빈이 되었다.[* [[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 6월 15일 병자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406015_002|#]] ]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나이 80세까지 대단히 오래 살았다. 그런데 하필 [[연산군]] 시절까지 사는 바람에 그녀는 말 못할 고통을 겪었다. >이때 세조의 [[후궁]]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나이 80세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여승]]이 되어 항상 [[자수궁]](慈壽宮)에서 거처하다가 이 무렵 입궐하였는데, 왕이 나놀려면, 근빈에게 교자(轎子)를 타도록 하고, 궁인이 메게 하므로 궁인들이 항시 승혜(繩鞋)를 신고 갔다. 술이 취하면 왕이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고, 또한 근빈도 일어나 춤추게 하였는데, 근빈은 늙어서 할 수 없었으나 치열한 학대가 두려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9월 4일 [[연산군]]은 이미 [[성종(조선)|부왕]]의 후궁들을 때려 죽인 적도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사실을 딱히 은폐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의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라고 [[내수사]]에 명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살기 위해서 춤을 췄을 것이다. 연산군 때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