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군]]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오군영]]을 구성하는 [[군영]]. == 역사 == '''[[오군영]] 가운데 그 형성이 가장 늦어''' [[영조]]의 재위기간이었던 1754년에야 독립된 군영으로 편제되었다. 금위영의 시초는 1682년 [[병조]] 소속의 정초군(精抄軍)[* [[어영청]] 병력이 [[청나라|청]]의 요청에 의해 [[명나라|명]]과의 [[전쟁]]에 투입되자 수도 방위를 위하여 경기 지역의 [[속오군]] 중 정예 자원을 가려뽑은 부대.]과 훈련별대(訓鍊別隊)[*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모두 [[직업군인]]인데 비해, 훈련별대 소속 군인들은 번상하여 [[군역]]을 수행하던 농민들이었다.]를 통합한 것이었는데 그 통합의 이유가 경비 절감 차원이었다. 훈련도감 항목에 나와있듯이 도감군은 그 시대 다른 조선의 [[관군]]과 달리 직업군인이었기에 상당한 인건비를 요구하였는데 이 돈을 아끼고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한 것이다. 금위영은 이름과는 달리 [[금군]]의 군영이라기보다는 [[훈련도감]]·[[어영청]]과 더불어 삼군문으로 불리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의 중추역할을 맡았던 금위영의 [[대장]]은 [[병조판서]]가 겸임하였지만[* 금위영 설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숙종(조선)|숙종]] 초년의 실세 [[외척]] [[김석주]]였기 때문에 빚어진 상황이다. 사실 [[훈련도감]]은 설치 이후 서인 계열 무반들이 장악하였고,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모두 서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부대들이였으나, 유일하게 현종시기 남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막대한 자금이 소모되던 훈련도감의 문제 해결을 이유로 훈련별대를 조직하였다.(이렇게 한 이유는 서인의 중심이던 산림들은 쫓겨났지만, 왕실의 외척으로 남아있던 광산 김씨를 바탕으로 서인의 군 장악력은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이후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면서 이를 다시 없애는 차원에서 창설한 것이 [[금위영]]이다.] [[영조]] 연간에 금위대장을 별도 임명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금위영은 어영청보다 늦게 만들어졌지만 훈련도감의 병력이 기간병이 되었다는 근거로 어영청보다 앞서는 것으로 대우받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시기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일시적으로 그 위상이 강화되기도 했으나, [[고종(조선)|고종]]의 [[친정]] 이후 다시 ~~[[도루묵]]~~ 원상복귀되어 1881년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95년에 폐지된다. 어영청과 비슷한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였으며, 주력은 5초 (5개 [[중대]]급)의 번상정군이었고, 그 수가 625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포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번상정군 외에도 교대 없이 복무하는 [[기병]]인 기사 150명, 별무사/별효위 62명, 번상하는 별파진과 겸별파진 50명등, 여러 잡다한 병종들도 포함하여 그 수가 약 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영청과 마찬가지로 [[반란]] 진압의 선봉으로 활용되어 유사시 순무영을 형성하였으며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 등에 투입되어 [[반란군]]을 진압한 바 있다. == 복식 == [[파일:청전복.png]] 금위영의 보군들은 주로 [[전립]]에 청전복을 착용했으며 [[갑주]]는 입지 않았던것으로 보인다. [[파일:별기대.png]] [[파일:철갑.jpg]] 금위영의 기사들 또한 전립에 청전복[* 보군의 [[철릭|전복]]과 다르게 [[소매]]가 홍색이다.이는 [[무관]]의 [[구군복]]도 마찬가지이다.]을 착용하였는데 갑주로는 철갑[* 내부 갑찰이 철인 [[두정갑]]으로 상하분리형이다.]과 피갑[* 내부 갑찰이 [[가죽]]인 두정갑으로 상하일체형이다.]을 혼용하였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오군영, version=211, paragraph=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