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 왕궁의 금천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 왕궁의 금천교.png|width=100%]]}}} || || {{{#gold '''조선 왕궁의 금천교. 위쪽 왼편 사진부터 오른쪽으로 경복궁 영제교, 창덕궁 금천교,[br]아랫쪽 왼편 사진부터 창경궁 옥천교, 덕수궁 금천교, 경희궁 금천교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궁궐|조선 왕궁]]의 [[교량|다리]].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다리이다. [[금천]]은 [[풍수지리|풍수지리적]]인 이유[*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하였다.]와 [[밖|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물론 실제 [[궁궐]]과 [[밖|외부]]의 경계는 [[문|궁문]]과 [[담|궁장]]이지만, [[귀신|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둔 것이다. == 이름 == 보통 '금천교'로 부르나, 이름이 따로 있는 다리들도 있다.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의 금천교는 '옥천교(玉川橋)'이다. 다만, 이 다리들도 [[보통명사]]인 금천교로 불리기는 했다. 한자 표기도 다양했다. 《[[조선왕조실록]]》와 《[[승정원일기]]》을 보면, ''''錦'''川橋', ''''禁'''川橋', ''''金'''川橋'를 사용했다. 그 중 ''''錦'''川橋'는 주로 조선 전기 경복궁과 [[창덕궁]]의 금천교를 가리켰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종(조선)|명종]] 때 까지만 나왔고 《승정원일기》에서는 [[영조]], [[정조(조선)|정조]] 시기에 7번 정도 나온 것이 전부이다. ''''禁'''川橋' 표기는 [[광해군]] 시기부터 보이며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 때까지 사용하였다. ''''金'''川橋' 표기는 [[광해군]]과 [[효종(조선)|효종]] 시기에 잠깐 쓰였으며 자주 사용하는 표기는 아니었다. == 목록 == ※ [[경복궁]]의 경우는 [[중문]]과 [[정전]] [[정문]] 사이에 금천이 있으며, [[창경궁]]의 경우는 중문이 없기 때문에 [[정문]]과 정전 정문 사이에 있다. * [[경복궁 영제교]]: [[경복궁 흥례문|흥례문]](중문)과 [[경복궁 근정문|근정문]](정전 정문) 사이에 있다. * [[창덕궁 금천교]]: [[창덕궁 돈화문|돈화문]](정문)과 [[창덕궁 진선문|진선문]](중문) 사이에 있다. * [[창경궁 옥천교]]: [[창경궁 홍화문|홍화문]](정문)과 [[창경궁 명정문|명정문]](정전 정문) 사이에 있다. * [[덕수궁 금천교]]: [[덕수궁 대한문|대한문]](정문)과 [[덕수궁 조원문|조원문]](중문) 사이에 있다. * [[경희궁 금천교]]: [[경희궁 흥화문|흥화문]](정문)과 [[경희궁 건명문|건명문]](중문) 사이에 있다. == 구조 == * 다리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큰틀에서는 대부분 모양이 비슷하다. 아랫 부분에 선단석을 놓고 그 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건축)|아치]][* 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를 2개 만들었다. 아치 사이 공간은 판축다짐으로 채워 몸체를 만들었고, 그 위에 박석이나 장대석으로 [[길|돌길]]을 놓은 모습이다. 다리 양 가장자리에는 돌 난간을 두었고, 난간과 몸체 일부에 [[해치]], [[거북]], [[사슴|천록]] 등 악귀를 막는 [[동물]]들과 연꽃봉오리 등을 조각했다. == 여담 ==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천교는 [[창덕궁 금천교]](1411년)이고, 가장 나중에 만든 금천교는 [[덕수궁 금천교]](1900년대 초반)이다. * 현재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는 금천은 [[창경궁]] 금천이다.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복궁 영제교, version=55)] [[분류:금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