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독립운동가, rd1=김마리아(1903), other2=친일반민족행위자, rd2=박마리아)] [include(틀:여성 독립운동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김마리아}}}[br]金瑪利亞'''}}}}}} || ||||<#ffffff>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마리아.jpg|width=100%]]}}} || ||<|2> {{{#FFFFFF '''출생'''}}} ||[[1891년]][* 호적 및 광산김씨평장대보 권36 364쪽에는 189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6월 18일]] || ||[[황해도]] [[장연군|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br](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 || ||<|2> {{{#FFFFFF '''사망'''}}} ||<#ffffff>[[1944년]] [[3월 13일]] {{{-1 (향년 52세)}}} || ||[[함경남도]] 원산부 [br] (現 강원도 원산시) || || {{{#FFFFFF '''사인'''}}} ||<#ffffff>[[고문]] [[후유증]]으로 병사 || || {{{#FFFFFF '''본관'''}}} ||<#ffffff>[[광산 김씨]](光山)[* 문숙공후-판도판서공파 35세 현(鉉) 항렬이나 항렬자는 쓰지 않았다. 다만 오빠 김일현(金一鉉, 1890 ~ ?)은 항렬자를 사용했다.] || || {{{#FFFFFF '''직업'''}}} ||<#ffffff>독립운동가, 인권운동가, 교사 || || {{{#FFFFFF '''부모'''}}} ||<#ffffff>아버지 김윤방, 어머니 김몽은 || || {{{#FFFFFF '''학력'''}}} ||<#ffffff>소래보통학교[*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 있던 학교로 현존하는가는 불명이며 시흥의 소래초등학교와는 다른 학교이다.] {{{-2 (졸업)}}}[br][[정신여자고등학교|연동여학교]] {{{-2 (졸업)}}}[br][[난징대학]] {{{-2 (학사)}}}[br][[파크 대학교|파크 대학교 대학원]] {{{-2 (석사)}}}[br][[시카고 대학교|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2 (석사)}}}[br]미국 성서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 (수료)}}} || || {{{#FFFFFF '''종교'''}}} ||<#ffffff>[[개신교]] || || {{{#FFFFFF '''정당'''}}} ||<#ffffff>[[대한애국부인회]] || || {{{#FFFFFF '''묘소'''}}} ||<#ffffff>[[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18호 || || {{{#FFFFFF '''상훈'''}}} ||<#ffffff>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 '''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 > 일본군의 심문 중에서.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 아들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며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순애(독립운동가)|김순애]]에게는 김마리아가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필순]]은 그녀의 삼촌이고 김필순의 아들인 [[중국]]에서 활동한 미남 배우 [[김염]]은 김마리아의 사촌동생이다. == 생애 == 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부친 김윤방(金允邦, 1851 ~ ?)[* 족보명은 김언순(金彦淳).]과 어머니 [[김(성씨)|무장 김씨]](茂長 金氏) 김몽은(金蒙恩, ? ~ 1904)[* 김규창(金奎昌)의 딸이다.] 사이의 3자매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이름인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 김윤방이 지은 것이며 김윤방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웠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에 언니들과 다니면서 개신교 정신에 입각한 평등과 신학문을 배워나갔다. 1905년 [[연세대 의대|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근무하던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유동열]], [[이동휘(독립운동가)|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그녀는 김필순의 도움으로 숙부의 집에서 1906년 연동여학교[* 현 [[정신여자중학교]] &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를 다니면서 [[민족]] 정신을 갖고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낸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910년 연동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의 수피아여학교[* 현 [[수피아여자중학교]]&[[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시]]를 거쳐 [[도쿄도|도쿄]]의 여자학원[* 女子学院. 1870년에 설립된 [[미국 북장로교]] 계열의 중고등학교로 女子学院中学校・高等学校이라는 이름으로 현존한다. 똑같이 '동경여자학원'으로 읽히는 도쿄죠시가쿠인(東京女子学院)과 도쿄죠시가쿠엔(東京女子学園)과는 별개의 학교다.]에서 수학했는데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및 구금되었는데 이 때 고문을 당해 몸이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가져왔는데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오비]](허리띠)에 [[종이]]를 숨겼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시|난징]]의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金陵)대학에서 수학하였지만 [[독립운동]]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식상한 그녀는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시|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김마리아 1.jpg|width=100%]]}}} || || 1923년 파크 대학교 졸업식에서의 김마리아. || 이후 그녀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朴仁德)[* [[인덕공업고등학교]]와 [[인덕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일제 말기에는 변절하여 친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서울특별시|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 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제국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는데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썼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회]], [[감리회]]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1943년에 오래 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시|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결국 [[평양시|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미혼이라 자손은 없으며 사실 [[결혼]]을 못 한 이유는 본인의 의지도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이유도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한쪽 가슴과 국부를 인두로 지지는 혹독한 [[성고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녀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 기타 == * 생전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와 가깝게 지내서 주위에서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김마리아와 김철수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김철수에게는 이미 고향에 본처가 있어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고향에 집안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정해 준 본처를 둔 것과는 별도로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과 새로 결혼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구시대적 인습과 자유 연애&연애 결혼이라는 신식 풍속이 공존하던 과도기의 모습이다.] * 2.8 독립 선언에 함께 참가했던 [[이광수(소설가)|이광수]]가 쓴 〈누이야〉(1933년)라는 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기념하여 그녀를 소재로 쓴 것이다.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나 심문하던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 등이 남아 있다. * 1998년 7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사후 업적을 기려 [[서울특별시]] 보라매 공원에는 그녀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2004년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졌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1891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장연군 출신 인물]][[분류:광산 김씨]][[분류: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인물]][[분류:정신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난징대학 출신]][[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이달의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