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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B, #BC0021 20%, #BC0021 80%, #9C001B)" {{{#fffff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 [br]{{{+1 김보현}}}[br]金輔鉉'''}}}}}}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09px-김보현.jpg|width=100%]]}}} || ||<|2> {{{#fff '''출생'''}}} ||[[1871년]] [[10월 3일]][* 음력 [[8월 19일]].]|| ||[[조선]] [[평안도]] [[평양부]] (現 [[평양시]])|| ||<|2> {{{#fff '''사망'''}}} ||[[1955년]] [[9월 2일]] (향년 84세)|| ||[[평양시]]|| || {{{#ffffff '''본관'''}}} ||[[전주 김씨]] || || {{{#ffffff '''가족'''}}} ||아버지 [[김응우]][br]아들 [[김형직]], 김형록[* 김형직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해방때까지 생존해서 만경대로 돌아온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후로 딱히 고위직을 맡지는 않았고 사망년도도 미상이다. 다만 김형록의 장남인 [[김창주(1922)|김창주]]는 고위직을 맡았다.], [[김형권]][br]며느리 [[강반석]][br]손자 '''[[김일성]]''', [[김철주(북한)|김철주]], [[김영주(북한)|김영주]], [[김창주(1922)|김창주]][* 김형록의 아들.], 김원주[* [[김형권]]의 아들.][br]증손자녀 '''[[김정일]]''', [[김만일(북한)|김만일]], [[김경희(1946)|김경희]], [[김평일]], [[김영일(북한)|김영일]], [[김현(북한)|김현]], 김백연[br]현손자녀 [[김정남(북한)|김정남]], 김설송, 김춘송,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br]내손자녀 [[김한솔]], [[김주애]]|| || {{{#ffffff '''경력'''}}} ||황해도 배천군 부군수[br]?~[[1903년]] [br] 평안남도 대동군 태수[br][[1945년]] [[8월 3일]] ~ [[1946년]] [[8월 3일]]|| [목차] [clearfix] == 개요 == [[북한]]의 농민이자 [[대한제국]]의 전 하급 관료. '''[[김일성]]의 할아버지'''이다. == 생애 == [[1871년]] [[8월 19일]], [[평안도]] 평양부[* 現 [[북한]] [[평양시]].]에서 [[만경대(북한)|만경대]] 산당지기이자 [[묘지기]]인 [[김응우]]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김응우가 일찍 사망하여 [[소작]]살이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젊은 시절 매관매직으로[* 이미 구한말 흥선대원군 시절 [[공명첩]]의 영의정 직위가 쌀 몇섬으로 폭락 했으니 그 이하는 묘지기도 살 정도의 가격] 관직을 샀는데 [[공명첩]]으로 실직이 아닌 '''부'''자 들어가는 저가양산형 관직을 산거 같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황해도]] [[배천군]] 부군수 자리에서 파직된 후에는 다시 농민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보익과 결혼하여 김일성의 아버지인 장남 [[김형직]] 등 3남 3녀를 낳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김일성]]을 양육하였다고 전해진다. 1945년 [[김일성|손자]]가 [[소군정|소련군을 앞세우고 돌아온 뒤로는]] 대동군 태수를 지냈지만 1년 만인 1946년에 사임했고 이후로 손자가 내각수상에 선출되어 본격적으로 국가원수 자리에 오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예하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이라는 명예직을 맡았다가 1년만인 1949년에 은퇴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1955년에 세상을 떴다. == 여담 == 당시 노인으로서는 장수하여 84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 비슷한 시기를 산 이승만과 함태영 정도는 아니더라도 평균 수명이 60대 정도였던 당시로서는 오래 살다간 셈이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인 [[김형직]]보다 29년이나 더 살다 갔다. '''[[김일성|자신의 손자]]가 [[6.25 전쟁|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남로당]]에게 돌려 숙청하는 꼬라지까지 다 지켜보고 간 것이다.''' 사실 관료로써 재능이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농사지어 겨우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다가 말년이 되어서야 손자의 덕을 봐서 드디어 자리를 얻었지만 이미 북한 정부가 수립될 때 쯤이면 나이가 들었던 탓에 은퇴한 인물이라 김일성과 그 형제를 기른 것을 빼면 그리 특출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우상화를 위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우상화 되고 있다. 완전히 별 거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할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보직을 받아 죽을 때까지 김일성에게 예우를 받으며 살다 갔다. 농업 간부 재교육을 위한 김보현대학은 1994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한 명칭이며, [[만경대(북한)|만경대]]의 묘지에는 그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김일성]]에게는 할아버지이지만 1912년 생인 김일성보다 5살 연하로 1917년 생인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1871년 생 동갑내기이다. [[박성빈]] 쪽이 [[박정희]]를 무려 46살에 낳았기 때문이다. 물론, 김보현과 김일성 사이에 들어가는 [[김형직]]은 1894년 생으로 박성빈의 차남 박동희(1895~1967)와는 불과 1살 차이밖에 안 난다. 처 이보익과 함께 김일성을 "일성아" 혹은 "성주야"라고 부를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외에 사적으로는 [[김책]], [[최현]], [[최용건]] 등 뿐이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보현, version=11, paragraph=3)] [[분류:1871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김일성 가문]] [include(틀:포크됨2, title=김보현(북한), d=2023-02-10 14:1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