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CD313A 30%, #CD313A 70%, #B71D27)" {{{#ffffff '''김정남의 역임 직책'''}}}}}} || || {{{#!folding ▼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4> {{{#333333,#cccccc '''대표팀'''}}} || || [[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비전임제)|[[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CD313A; font-size: 0.9em" [[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비전임제)|{{{#ffffff '''대한민국'''}}}]]}}}[br]{{{-2 33대, 36대, 41대, 43대}}} || || || || ||<-4> {{{#333333,#cccccc '''클럽'''}}} || || [[틀:울산 현대 감독|[[파일:울산 현대 엠블럼 (1999~2010).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008c33; font-size: 0.9em" [[틀:울산 현대 감독|{{{#fecd00 '''울산 현대'''}}}]]}}}[br]{{{-2 6대}}} || [[틀:제주 유나이티드 FC 감독|[[파일:vWNTG4M.jp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1002A; font-size: 0.9em" [[틀:제주 유나이티드 FC 감독|{{{#ffffff '''유공 코끼리'''}}}]]}}}[br]{{{-2 2대}}} || || || ---- ||<-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width=25]]]][br][[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ffffff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ffffff '''주장 ''' }}} || || [[정병탁]][br](1970) || {{{+1 ▶ }}} || {{{#ffffff '''김정남[br](1970~1971)''' }}} || {{{+1 ▶ }}} || [[박이천]][br](1972)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CD313A 30%, #CD313A 70%, #B71D27)" {{{#ffffff '''김정남의 수상 이력'''}}}}}} || || {{{#!folding ▼ ---- ||<-4> {{{#333333,#cccccc '''둘러보기 틀 모음'''}}} || ||<-4> {{{#333333,#cccccc '''개인 수상'''}}} || || [[대한축구협회 시상식#s-7.1|[[파일:대한축구협회 로고.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00145a; font-size: 0.9em" [[대한축구협회 시상식#s-7.1|{{{#fff '''1971 KFA 최우수 선수'''}}}]]}}} || [[K리그1|[[파일:K리그1 로고.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ee3224; font-size: 0.9em" [[K리그 대상#s-6.1|{{{#ffffff '''1989 K리그1 감독상'''}}}]]}}} || || || ||<-4> {{{#333333,#cccccc '''베스트팀'''}}} || || [[대한축구협회 시상식#s-7.2|[[파일:대한축구협회 로고.svg|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00145a; font-size: 0.9em" [[대한축구협회 시상식#s-7.2|{{{#fff '''KFA 베스트 11'''}}}]]}}} ||<-3>1969 · 1970 · 1971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CD313A 30%, #CD313A 70%, #B71D27)" {{{#ffffff '''김정남의 기타 정보'''}}}}}} || || {{{#!folding ▼ ---- [include(틀:K리그 명예의 전당)]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 || ||<-3> [[파일:/news/201002/08/newsis/20100208174508218.jpg|width=100%]] || ||<-2> {{{#000000,#e5e5e5 ''' 이름 ''' }}} || {{{+1 '''김정남'''}}}[br]'''金正男 | Kim Jung-Nam''' || ||<-2> {{{#000000,#e5e5e5 ''' 출생 ''' }}} ||[[1943년]] [[1월 28일]] ([age(1943-01-28)]세) [br] [[평안북도]] [[자성군]] [br] (現 [[자강도]] [[자성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6400|링크]]] || ||<-2> {{{#000000,#e5e5e5 ''' 국적 ''' }}}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2> {{{#000000,#e5e5e5 ''' 신체 ''' }}} ||[[키(신체)|신장]] 170cm || ||<-2> {{{#000000,#e5e5e5 ''' 직업 ''' }}} ||[[축구 선수]] ([[수비수(축구)|수비수]][* [[센터백]]([[스위퍼(축구)|스위퍼]]) ] / ^^은퇴^^)[br][[축구 감독]][br][[축구 행정가]] || ||<|2>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양지 축구단]] (1967~1970) [br] [[한국외환은행]] 축구단 (1971~1974) || || {{{#000000,#e5e5e5 ''' 감독 '''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대표팀]] (1975~1980 / ^^ 감독 대행^^) [br]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대표팀]] (1980~1982) [br] [[유공 코끼리]] (1982~1985 / ^^ 감독 대행^^) [br]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대표팀]] (1985~1986)''' [br] [[유공 코끼리]] (1985~1992) [br]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대표팀]] (1988)''' [br] [[산둥 루넝]] (1998) [br] 칭다오 중넝 (1999) [br] '''[[울산 현대]] (2000~2008)''' || ||<-2> {{{#000000,#e5e5e5 ''' 국가대표 ''' }}} ||66경기[* (1964년 올림픽 예선, 본선 3경기. 1967년, 1971년 올림픽 예선 7경기 포함)]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 1964~1973)^^ || ||<-2> {{{#000000,#e5e5e5 ''' 병역 ''' }}} ||[[대한민국 해병대]]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 [[1960년대]]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 [[김호]]와 함께 한국 국가대표 센터백 듀오. 감독으로서는 한국을 32년만에 다시 월드컵 본선[* 54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으로 이끌며, 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첫 승점을 기록한 명장[* 본선 24강 조별리그에서 우승팀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월드컵 첫 골, 대회 15위팀 유럽 불가리아에게 월드컵 첫 승점,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에게 월드컵 첫 다득점을 기록하며 86월드컵 20위를 기록] [[고려대학교]] 법학과(61학번) [[학사]], 前 축구 선수, 前 축구 감독. 前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現 한국OB축구회 회장. == 선수 경력 == === 유소년 시절 ===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으며, 당시 좁은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연습하곤 했다. 이 덕택에 키핑과 기술이 좋아서 두각을 드러내 [[중학교]]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학원축구는 1부, 2부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김정남은 동아리 느낌인 2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던 김정남은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경쟁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하게 되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양공고가 운동장도 좁은 편이라 3:3, 4:4 등 소규모 인원의 보충훈련을 즐겨하며 계속 수비력과 기술이 발달했는데, 어느 날 주전선수가 아파서 대신 경기에 출장하게 된 이후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된다. [[봄]]에 먼저 19세 대표팀에 선발됐고, 이어 그 해 [[여름]]에 성인 대표팀에도 선발된다. === 성인 시절 === 원래는 풀백 출신이었으나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이 유행하자 김정남은 스위퍼의 역할을 맡았고, 김호는 스토퍼의 역할을 맡아 대단히 성공적인 국가대표 경력을 꾸리게 된다. [[파일:external/footballk.net/250px-%EA%B9%80%EC%A0%95%EB%82%A8%EA%B3%BC_%EA%B9%80%ED%98%B8.jpg]] 열정적인 김호와 달리 냉정하고 침착하게 플레이했다고. 부상으로 고생하다 71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는데, 축협 회장의 권유로 호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으나 알고 보니 플레잉 코치였다. 이렇게 선수생활을 연장한 김정남은 1974년 외환은행에서 은퇴한다. === 플레이 스타일 === 1960~1970년대 한국 최고 수비수였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수비를 했으며 원래 공격수였는데 경쟁자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했다고 하며 풀백보다 센터백이었을 때 더 뛰어났다.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으로 인해 김정남 본인이 스위퍼, 센터백 듀오였던 김호가 스토퍼 역할을 했으며 당시 최고의 센터백 듀오였다. 뛰어난 수비력과 좋은 키핑력,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 지도자 경력 == 선수 [[은퇴]] 후 [[1980년대]] 초, 함흥철 감독을 보좌하며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수행했다. 이 때 이미 전술적인 부분은 김정남이 담당했다고 한다. [[1983년]]부터는 [[제주 유나이티드|유공 코끼리]]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1986년]]에는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멕시코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스위스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 이후 '''32년만에 86멕시코월드컵 24강 본선으로 이끌었다.''' 사실 대표팀이 출범할 때는 수석코치였는데, 지역예선 도중 [[문정식]] 감독이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말레이시아]]전 패배로 [[경질]]되면서 그 자리를 승계한 것이었다. 이후 24강 본선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한 조가 되는 어려운 조에 속했다. 사실 당시 월드컵은 32강이 아닌 '''24강''' 본선 진출이기 때문에 아시아는 월드컵 진출 티켓이 단 2장이었고, 24강 조별리그 체제까지는 북중미,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팀들이 서로 같은 조에 편성되기가 어려웠던 만큼 지금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디펜딩챔피언,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 우승팀, 불가리아는[* 유럽예선에서 프랑스를 2:0으로 승리하였고 유고, 동독을 제치고 1986년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하였고, 1차전에서 디펜딩챔피언 이탈리아와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기록하며 이 대회 16강 15위를 기록했다.] 이 대회 16강 15위팀'''이라서 운이 없었다.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김정남은 일단 적응하기 위해 30분간 수비적으로 운영하라는 지시를 했으나, 선수들이 긴장한 나머지 수비적으로 운영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비에만 일관하고 몰려다니며 포메이션을 붕괴시키는 등 전혀 경기 운영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2실점을 했다. 이후 후반전에는 오히려 이판사판으로 하자면서 경기력이 좋아졌졌고, 대한민국 월드컵 '''첫 골'''을 기록했다. 불가리아전에서는 수중전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대한민국 월드컵 '''첫 승점'''을 획득, 이탈리아전에서는 멕시코 언론마저 심판이 도와줬다고 할 정도로 불리한 판정 아래 '''3:2''' 패배를 했지만 대한민국 '''첫 다득점'''을 기록하며, 월드컵 24강 최종순위에서 '''EPL멤버 북아일랜드'''를 제치고 '''승점 1점 1무 2패 월드컵 20위'''를 기록하였다. 이 때 조 3위도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김정남은 이탈리아전의 1골만 더 기록했으면 다득점에 앞서서 진출 할 수 있었던 패배를 많이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 해 당시 A대표팀 대회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강팀 사우디를 2:0으로 격파하며, 금메달 우승을 차지한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당시 명실공히 아시아 최고의 팀이었다. 1984년 올림픽 본선 진출, 1984년 아시안컵 우승, 1988년 아시안컵 우승, 1992년 아시안컵 준우승, 1994년 월드컵 16강 12위, 1996년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아시안 게임은 성인 대표팀 출장 무대였는데, 이런 아시아 최고의 팀을 상대로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홈경기에서 우승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A대표팀 대회였던, 88서울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에서도 다시 감독을 하였고, 비록 8강에는 실패했지만, 이 대회 금메달팀 소련에 0:0 클린시트 승점 1점 획득, 미국전 0:0 무승부 승점 1점도 기록하였으나, 아르헨티나에 1:2로 아쉽게 패하여 대회 11위로 선전하였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도 역임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다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K리그 [[울산 현대 축구단|울산 현대 호랑이]]의 감독을 맡았고, 2006년 한중일 챔피언 대결이었던 [[A3 챔피언스컵]] '''도쿄'''에서 J리그 우승팀으로 올라온 감바 오사카를 [[이천수]]의 [[해트트릭]]으로 '''6:0'''으로 격파하였다.[* 한일전 모든 축구 매치 최다점수차 경기이며, 당시 감바 오사카 감독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일본 대표팀을 이끈 [[니시노 아키라]] 감독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1.gif|width=100%]][br][[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2.gif|width=100%]][br][[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3.gif|width=100%]][br][[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4.gif|width=100%]][br][[파일:2006 울산 오사카 하이라이트 5.gif|width=100%]]}}} || 그리고 중국 슈퍼 리그 챔프인 다롄 스더를 4:0으로 각각 떡실신 시키며 우승을 차지하는가 하면, 사우디 챔피언 알 샤밥을 2006년 AFC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6:0으로 발라버리며 '아시아의 깡패'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울산의 짱짱한 스쿼드를 가지고 수비 축구를 한다는 비아냥을 사곤 했지만, 언제나 팀을 상위권에 올리곤 했기 때문에 울산현대의 팬들 입장에서는 [[단어]] 그대로 "시원섭섭" 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한창 이름을 날리 시절에는 [[허정무]]와 함께 [[노잼|재미없는]] 축구의 대명사로 군림했었는데, '''"그래도 김정남은 재미없어도 결과보면 이겨있잖아, [[무재배|근데 허정무는 아니잖아(...)]]"'''라며 무승부에 취한 [[전남 드래곤즈|전남]] 팬들이 울산 팬들을 부러워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K리그]]가 [[뻥축구]]에 수비축구라는 편견을 [[일반인]]들이 가지는데 한몫한 감독 중 하나. 이후 울산은 어떻게 된 건지 [[김호곤|감독이 바뀌어도]] 팀컬러가 수비지향이 되어 버렸다.--그리고 아예 철퇴축구로 진화했다(...).-- 그래도 이 분이 [[무능]]하지는 않기에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팀 상태만큼 성적을 내 주는 감독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K리그에서 유일하게 별 탈 없이 [[이천수]]를 제어했던 감독이었다'''. [[전남 드래곤즈|전남]],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 [[인천 유나이티드|인천]], [[레알 소시에다드|스페인]], [[페예노르트|네덜란드]], [[알 나스르 FC|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팀 프런트, 감독, 선수들과 온갖 잡음이 있었지만, '''김정남 감독 아래에 있던 시절에는 정말 순한 한 마리의 양이었다'''. 김정남 감독이 이천수를 제대로 제어한 덕택에 2005 시즌 울산은 K리그 우승을 비롯 탄탄대로를 걸을 수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유상철, --최성국-- 등 한 성격 한다는 선수들도 손쉽게 제어하는 등 그야말로 선수 기강을 잘 잡는 감독이었다. [[2000년대]] K리그에서의 김정남 감독을 본 축구팬들은 거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모습만 봤기에 상상이 가기 힘들지만, [[2013년]] 방송된 '태극전사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1986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정남 감독이 선수들을 강하게 다그치는 모습과 함께 그 당시 선수였던 축구인들이 [[별명]]이 '광기'였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울산 현대 감독을 맡았던 [[2001년]]에는 선수단에게, 외국인 선수도 예외 없이 포함해서 [[해병대]]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20&aid=0000050892|#]] 그렇긴 해도 본래 축구계에서 부드러운 성격이었긴 한 것 같다.[* 김호 김정남과 동세대인 이세연이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 펀칭을 하면서 주먹으로 동시에 공격수의 얼굴을 쳐서 치아를 날렸다는 시대였다.]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제주 유나이티드|유공 코끼리]]의 감독 재임 중에 [[1989년]]에 한번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유공-부천 SK-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의 K리그 우승 기록이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울산 현대|울산]] 감독 재임 중에 2005년에 한 번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감독 이후 == 2008년 [[12월]], 울산 감독직을 사임한 후 울산 현대 기술고문, 프로축구연맹 기술고문 등을 거쳐 [[2010년]]부터는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직을 맡았으며, [[2012년]]에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한국OB축구회 회장직 출마를 위해 [[2013년]] [[12월 31일]] 부로 사임하였다. [[2014년]] [[1월 16일]], 유효표 21표 중 12표를 획득해 한국OB축구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2023년 [[K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탄생한 [[K리그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 6인[* [[최순호]], [[홍명보]], [[신태용]], [[이동국]], 김정남, [[박태준]]]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다만 최근에는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진 탓인지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는 본인이 참석하지 못하고 손자를 대신 보냈다. == 여담 == * 집안이 그야말로 축구 집안이다. 5형제의 맏이인데, 동생인 김강남, [[김성남]], 김형남 모두 축구선수였다.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인데 김강남과 김성남은 동시에 국가대표를 뛰면서 쌍둥이 국가대표로 유명했다.[* 배구에도 비슷한 사례로 [[이재영]], [[이다영]]이 있다. 이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를 동시에 뛴 바 있고, 이 두 선수의 어머니는 88 올림픽 배구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김경희다. 다만 이들은 [[이재영-이다영 학교폭력 논란|'''배구계를 넘어 대한민국 예체능계 전체를 흔든 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 [[배우]] [[한지민]]이 김정남 감독의 5촌 [[조카]]다. 당연하지만 한지민도 [[축빠]]라고 한다. * 축구계는 영어구사가 가능한 축구인들이 많은데, 이 김정남은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축구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 인터뷰나 언행을 보면 상당히 부드럽고 겸손하고 신사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축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와의 라이벌 관계는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인지 2000년대에 접어들고도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납득이 안 가는 판정에 거세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하고 벌금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엄청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 시대를 대표하는 축구인이라면서 국가대표 경기수가 의외로 60~70경기밖에 되지 않는데, 사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는 축구팬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늘어난 것이다. 아마도 자료 미비로 인해 상당수 경기의 존재가 묻혀 있어서 피파에 의해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 당시는 외국의 클럽팀이나 브라질 무슨무슨 주의 대표팀, 혹은 대표팀 2진을 상대로 경기를 자주 치르다 보니 A매치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감독)] [[분류:1943년 출생]][[분류:1967년 데뷔]][[분류:자성군 출신 인물]][[분류:실향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 신자]][[분류:한양공업고등학교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출신]][[분류:해병대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분류:센터백]][[분류:양지 축구단/은퇴, 이적]][[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64 도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역대 감독]][[분류:울산 현대/역대 감독]][[분류: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감독]][[분류:AFC 아시안컵 준우승 감독]][[분류: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분류가 있으므로 중복 분류 추가는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