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e0ffff 100%)" '''{{{+1 김종태}}}[br]李韓烈 | Lee Hanyeo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종태 열사.jpg|width=100%]]}}} || ||<|2> '''출생''' ||[[1958년]] [[6월 7일]]||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부산광역시)|동구]] [[초량동]][br](現 [[부산광역시]] [[동구(부산광역시)|동구]] [[초량동]]) || ||<|2> '''사망''' ||[[1980년]] [[6월 14일]] (향년 22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서울)|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학력''' ||[[검정고시|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2 (합격)}}}[br]제일 산업중학교 {{{-2 (졸업)}}} || [youtube(GGjZfIpAgoo)]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자 [[열사]]. == 생애 == === '깨어있는' 노동자로서의 삶 === 1958년 부산 초량동에서 목수 김윤배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 미아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아리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빈민촌 중 하나였다. 하지만 70년대 재개발로 인해 그의 가족은 쫓겨나 [[성남시|광주대단지]]로 강제이주 당한다. 게다가 아버지마저 연탄가스 중독과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김종태는 엉겁결에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그로부터 그는 [[노동자]]가 되었다. 성남에서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17살에 성남 제일실업학교에 들어가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18살 때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http://www.kor-canaan.or.kr/|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가 공동체적 삶에 대해 공부했다. 농군학교를 수료한 후에는 제일실업학교 출신 노동자들로 구성된 '형제단'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김종태는 노동운동가로 한층 성장하게 된다. 그러던 중 [[http://www.jumin.org/home.htm|주민교회]]에서 이해학 목사를 만났다. 이해학 목사[* 참고로 이해학 목사는 현재 주민교회의 원로목사이시다.]는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한 바가 있는 진보적인 종교인으로 김종태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979년 연고지였던 미아리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사회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주변인들을 모아 독서회를 꾸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5.18 민주화운동|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 광주, 광주, 광주 ==== 군인이었지만 방위였기 때문에 김종태는 계속 주민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1980년 6월 1일, 주민교회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5.18을 겪고 광주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였는데, 김종태 또한 거기 있었다. 강단에 선 사람은 동화작가 윤기현으로 농민운동을 하던 중 광주에서 5.18을 겪었었다. 그가 광주의 참상을 말하자 주민교회의 교인들은 울었다. 헌데 김종태는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따졌다. 이에 윤기현은 그에게 직접 광주로 가보라고 말했다. 김종태는 곧 광주로 향했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성남으로 돌아왔다. 진실을 안 김종태는 사람들에게 5.18의 진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일 직접 유인물을 만들고 밤을 새워가며 등사하여 5.18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도 안 들어줬다고 한다. 1980년 6월 9일[* 이 날은 그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 날도 그는 열심히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형사가 나타나 그를 뒤쫓아왔다. 그러자 김종태는 유인물을 한꺼번에 뿌리고는 [[분신|미리 준비한 석유를 뒤집어쓰고는 불을 당겼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이 상황을 목격한 어느 [[약사]]가 소화기로 불을 꺼주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지 오래였다. 김종태는 지나가던 트럭에 실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5일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영원한 노동자 김종태님은 성남에서 일한 노동운동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형제단>을 만든 예수의 제자 5·18광주학살에 분노“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성명서 를 발표하고 80년 6월 9일 신촌네거리에서 분신 92년 5월 광주 5월 시민상 수상 광주의 정신과 하나가 되어 여기 묻히다. - 망월동에 묻힌 김종태의 묘비에 새겨진 [[http://cyber.518.org/sub.php?PID=01|글귀]] ==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 >오늘날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고자 분연히 일어났던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여! 그대들이 피를 흘리면서 성토하던 그 [[서울의 봄|안개정국]]은 이제 완전히 마각을 드러내어 뻔뻔스럽게도 그 음모와 책략을 표면화했습니다.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군장성들로 구성되었으며, 행정부의 전기능을 장악하고 그 우두머리에 [[전두환]] 중장이 상임위원장이란 감투를 쓰고 올라 앉았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최규하]]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하며 숱한 [[김영삼|민중의]] [[김대중|지도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숱한 학생들은 포고령의 이름으로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엔 또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지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 [[5.16 쿠데타]], 그후 19년간 장기독재, 아! 한국의 앞날이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박정권 20년간의 좋은 시절을 좀처럼 청산할 수 없다는 듯이 [[독재]] 밑에서 [[부정부패]]로 치부해 오던 유신체제 잔당들이 지금 이 나라를, 이 국민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유언비어가 되고 [[유언비어]]가 진실이 되어 버리는 이 어지러운 시국은 국민들에게 입을 막고 귀도 막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채,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채, 눈이 있어도 못 본 체해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국민들이 수군거려선 안 되는 무서운 음모, 계략들로 가득찬 정권야욕에 불타는 무리들, [[민주주의|민주]]가 어떻고 [[민족]]이 어떤지 안중에도 없는 무리들이 지금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한테 눌리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고쳐 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법과 질서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조직적인 폭력,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우리들의 모든 [[자유]]는 빼앗기고 눌린 채 한국의 밤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다수의 국민들은 저마다 모두 불신을 품고 앉아 점점 무기력해 가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정치적 무관심|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과연 무엇이 [[저항|산 것]]이고 무엇이 [[복종|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 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대한민국 국군|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고 있는데 [[이기주의|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지금 유신잔당들은 [[5.18 민주화운동|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거]]를 [[지역감정]]으로 몰아붙이며 '전라도 것들'이라는 식의 민심교란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사를 몽둥이로 진압하려다 실패하자 칼과 총으로 진압하고서 그 책임을 순전히 [[종북몰이|불순세력의 유언비어 운운]]하며 국민들을 기만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계엄철폐를 주장하면 계엄을 더 확대시키고 과도기간 단축을 요구하면 더욱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학생들에게는 자제와 대화를 호소한다니 정말 [[내로남불|정부에서 말하는]] [[모순|대화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안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계엄령 확대와 시민의 감시 등을 하기 위해서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전방의 병력을 빼돌려 서울로 집결시키는 조치]]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사리사욕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느꼈으며, [[권력]]이 그렇게도 잡고 싶은 것인 줄 새삼 느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국민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저력을 우습게 보고 있는 저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10.26 사태|독재자 박정희의 말로]]가 어떻게 끝났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살라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희생|나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질러 광주 시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길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 >1980년 6월 9일 >김종태 >---- >1980년 6월 9일,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111|<광주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전문]][*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다만 작성자가 김종태가 아닌 [[김의기]]로 잘못 적혀있고, 작성 날짜도 사실은 1980년 6월 9일이다.] == 참고자료 ==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7552|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2)_김종태편]]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종태, version=126)] [[분류:1958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분류:동구(부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자살한 인물]][[분류: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