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1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강계시 출신 인물]][[분류:리츠메이칸대학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2> '''{{{+2 김창영}}}[br]金昌永'''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창영.png|width=100%]]}}} || || '''창씨명''' ||金光昌永|| ||<|2> '''출생''' ||[[1891년]] [[10월 4일]]|| ||[[평안북도]] [[강계군]]|| || '''사망''' ||[[1967년]] [[4월 2일]] (향년 75세)|| ||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2 (졸업)}}}[br][[리츠메이칸대학]] {{{-2 (법과 / 학사)}}}|| || '''약력''' ||금산군수[br]강원도·전라북도 경찰부 경무과 경시[br]전라남도 산업부장·광공부장[br]경성부 부부윤 겸 기획실장||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의 친일 관료·경찰. [[미군정]]의 관료. == 상세 == 1891년 10월 4일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계공립보통학교에서 [[초등교사|훈도]]로 있다 일본으로 유학, 1916년 [[리츠메이칸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하여 [[강계군]] 공북면 [[면장]][* 강계군수 유진호의 추천]을 지내다 경찰계에 투신[* 평안북도 지방과장 다케이가 강원도 경찰부장으로 전직하면서 추천하여 데려감], [[강원도]]와 [[전라북도]]의 경찰부 경무과에서 경시로 근무했다. 1933년 [[전라북도]] [[금산군]]수[* 경찰 출신 가운데 근무 성적이 좋아 군수로 영전한 것]가 되었고 1937년 만주로 전입[* 만주 거주 조선인들을 관리할 책임자로 [[이범익]] 등과 함께 선발됨.]하여 [[만주국]] 치안부에서 근무했다. 1943년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관방 참사관으로 승진했다. 1943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산업부 및 광공부 부장을 역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자 당시 [[서울특별시장|경성부윤]]이었던 일본인 쓰지 게이고(辻桂五)가 업무를 놓으면서 그가 경성부윤으로 추대되어 사무를 인계받아 [[경성부]] 행정을 관장했다.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경성부 민정관으로 전직되었고, 이후 경성부 부부윤(부시장) 겸 기획실장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공민권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1967년 4월 2일 [[돈암동]]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사망했다. == 주요 친일 행적 == * 1938년 3월 [[만주국]] [[싼장성]] 팡정현(方正縣) 무영산(無影山)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군장 양징위(楊靖宇)의 부하 뤼사오차이 등 항일무장독립군 약 700여명을 귀순시킴 * 1938년 5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단장 [[김일성]], 제1로군 군수처장 오성륜 등 수 백명의 귀순공작을 전개[* 결국 실패함]. * 1940년 9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참모장 박득범 등 5명을 체포. 제1로군 제2군 제1단장 최현 부대의 무기 및 탄약 탈취. * 1942년 7월 만주국 협화회 조선인보도분과위원회 주도의 근로동원운동에서 공작원으로 활동. * 1942년 10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동북항일연군 최현의 참모인 임수산 이하 30여명, [[김일성]]의 부하 김재범 이하 6명 등, 수 백여명의 항일무장독립군을 체포·사살하는데 참여. * 1944년 3월 재단법인 조선송출근로자연성협회 이사에 임명 * 전라남도 산업부장 및 광공부장 재직 시 화순의 무연탄 채굴사업, 목재 반출, 송탄유 산출, 각종 군수물자 공출, 조선인 노무자 징용에 앞장 섬. [[분류: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