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39호}}}]]''' || ||<-2> {{{#fff {{{+1 '''김포 문수산성'''}}}[br]{{{-1 金浦 文殊山城}}}}}}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김포 문수산성, 너비=100%, 높이=200px)]}}}|| ||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288,018㎡ || || '''지정연도''' || [[1964년]] [[8월 29일]] || || '''건축시기''' || [[조선시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문수산성김포.jpg|width=100%]]}}} || || {{{#fff ''' 김포 문수산성 '''}}} || [목차] [clearfix] == 개요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번지에 위치한 [[산성]]으로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됐다. == 역사 == [[조선시대|조선]] [[1694년]] [[숙종(조선)|숙종]]때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1812년]] [[순조]]에 의해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갑곶돈대|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산성이다. 위에서는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의 여장을 둘렀고, 성문은 취예류와 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다. [[1866년]] [[고종(조선)|고종]]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가 침략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른 산성이다.[*출처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3FVdkVgwKey%3D13,01390000,31%26pageNo%3D5_1_1_0&ved=2ahUKEwi0s8DM5PL2AhWRVt4KHeRXDzoQFnoECCMQAQ&usg=AOvVaw0bVAm4seqhlhqhH7HRhk2T|문화재청]]] == 사적 제139호 == * [[https://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3FVdkVgwKey%3D13,01390000,31%26pageNo%3D5_1_1_0&ved=2ahUKEwi0s8DM5PL2AhWRVt4KHeRXDzoQFnoECCMQAQ&usg=AOvVaw0bVAm4seqhlhqhH7HRhk2T|문화재청 홈페이지: 김포 문수산성(金浦 文殊山城)]] || {{{#fff 문화재청 소개글}}} ||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 [[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김포시의 문화재]][[분류:산성]][[분류:성채/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