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 || {{{#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제3공화국))] ---- [include(틀:역대 경제수석비서관)] ---- [include(틀:역대 정무수석비서관)]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764 0%, #003764 20%, #003764 80%, #003764)" '''[[기획재정부장관|{{{#ffffff 대한민국 제10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br]{{{#ffffff {{{+1 김학렬}}}[br]金鶴烈 | Kim Hak-ryeol}}}'''}}}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김학렬.jpg|width=100%]]}}} || ||<|2> '''출생''' ||[[1923년]] [[3월 1일]] || ||[[경상남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 || ||<|2> '''사망''' ||[[1972년]] [[3월 21일]] (향년 49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10-21 || || '''본관''' ||[[경주 김씨]] || ||<|4> '''재임기간''' ||제21대 재무부 장관|| ||[[1966년]] [[9월 26일]] ~ [[1966년]] [[12월 27일]]|| ||제10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69년]] [[6월 3일]] ~ [[1972년]] [[1월 4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옥남 || || '''자녀''' ||슬하 3남 1녀 || || '''학력''' ||[[개성고등학교|부산상업학교]] {{{-2 (졸업)}}}[br]원산상업학교 {{{-2 (졸업)}}}[br][[주오대학]] 전문부 {{{-2 (졸업)}}} || || '''경력'''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br][[경제기획원]] 차관[br]재무부 장관[br]정무수석비서관[br]경제수석비서관[br]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 || [[파일:external/dimg.donga.com/73228331.2.jpg|width=100%]] || || [[포스코|포항종합제철]] 기공식에서 왼쪽부터 당시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대통령 [[박정희]]-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 || [목차] [clearfix] == 소개 == [[한국]]의 전 경제관료. 전임자인 [[장기영(1916)|장기영]], 후임자인 [[남덕우]]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개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 생애 == 1923년 [[경상남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군]]에서 태어났다. [[개성고등학교|부산상업학교]]와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외무직(현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외무직 1회 합격자가 되었다. 195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 대학교]] 등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나서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1963년 [[기획재정부|경제기획원]]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6년 [[기획재정부|재무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수석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에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문서 상단의 사진에도 나오듯,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에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이를 필두로 한국의 경제개발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고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 신임 [[서울특별시장]]인 [[양택식]]이 [[서울 지하철]]을 건설해야 한다고 하자, 김학렬은 서울로의 인구 집중, 물가 상승 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락]] 당시 [[주일대사]]가 지하철 건설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면서 양 시장의 손을 들어주자 지하철 건설 쪽으로 결정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051989|#]]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후 4년만인 1974년 개통되었다. 1972년 1월 지병인 [[췌장암]] 치료를 위해 부총리 직에서 퇴임하였고, 불과 2개월 만인 3월에 [[향년]] 49세로 사망하였다. 김학렬의 부고(訃告)를 듣자 박정희는 남몰래 통곡하였고 애증의 관계였던 [[장기영(1916)|장기영]][* 장기영이 경제부총리일때 김학렬은 차관이었다. 둘다 대통령의 신임이 대단한데다 저마다의 능력과 개성이 뚜렷하여 지위고하를 초월하는 라이벌 의식이 대단하였다고 전해진다.]은 김학렬의 빈소를 가장 먼저 찾아 병풍 뒤의 그의 시신을 한동안 바라본 이후 "그는 [[한강의 기적|개발연대]]의 순교자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이모저모 == * 이름의 학([[鶴]]) 때문에 별명이 쓰루였다.[* 鶴을 일본어로 [[쓰루]]라고 훈독한다.] 마침 꼬챙이처럼 호리호리한 체격이 학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 [[김수환]] [[추기경]]과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학도병 동기로 징병된 인연으로 생전에 둘은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 살아생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욕쟁이]]여서 장관 재임 시절 뭔가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현란한 [[육두문자]] 스킬을 발휘했다고 한다.[* 단순한 쌍욕이 아니라 식량자급률에서 시내버스 요금에 이르기까지 각종 수치를 인용해가며 별별 창의적인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일하던 공무원들은 불같지만 뒤끝은 없었던 김학렬의 성격을 이용하여 뭔가 일이 생기면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잠적하거나 만약 붙잡혔더라도 온갖 욕설을 뒤집어 쓸 지언정 평온한 태도로 듣고만 있으면, 김학렬은 제풀에 지쳐 잠잠해 졌다고... 후일 장관까지 지낸 어느 관료의 회고에 따르면 재무부 간부들이 모인 회의에서 열받은 김학렬이 자신에게 마구 쌍욕을 퍼붓는데도 개의치 않고 싱글벙글 미소만 짓자, 김학렬은 어이가 없었는지 자리에 앉더니 뜬금없이 볼펜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불렀다고 한다. * 김학렬의 3남이 김영수 이스트우드 컴퍼니 CEO다. 이 사람이 [[방용훈 부인 자살 사건]]의 피해자 이미란씨의 형부로 처제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방씨 일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 1966년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개발은행]] 창립총회가 열렸을때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참석하여 화제가 된 적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124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1-24&officeId=00020&pageNo=1&printNo=13878&publishType=00020|#]] *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던 거친 성격의 [[박종규]] [[경호실장]]도 김학렬에게는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분류:고성군(경상남도)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분류:1923년 출생]][[분류:1972년 사망]][[분류: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분류:정무수석비서관]][[분류:경제수석비서관]][[분류:박정희 정부/인사]][[분류:췌장암으로 죽은 인물]][[분류:개성고등학교 출신]][[분류:주오대학 출신]][[분류:경제기획원 차관]][[분류: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