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폐지된 행정구역)] [목차] == 개요 == 낙안군은 [[1908년]]까지 있었던 [[조선]]과 [[대한제국]]의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과 외서면, [[보성군]] [[벌교읍]] 일대이다. 그리고 이곳이 해체됨으로써 보성과 벌교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벌교읍]] 문서 참조. == 역사 == === 고대 ~ 고려시대 === 낙안군은 [[백제]] 때는 분차군(分嵯郡)이라고 불렸다. [[757년]], 신라 [[경덕왕]]에 의해 분령군(分嶺郡)으로 개칭하고 충렬현(忠烈縣, 현 [[고흥군]] 남양면 일대.), 조양현(兆陽縣, 현 보성군 조성면 일대.), 강원현(薑原縣, 현 고흥군 두원면 일대.), 백주현(栢舟縣, 현 고흥군 동강면 일대.) 4개의 속현을 관할했다. [[940년]]에 낙안으로 개칭되었고 [[나주시|나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이전에 관할하던 4개의 속현은 [[보성군]]으로 이관되었다. 동시에 충렬현, 강원현, 백주현은 남양현(南陽縣), 두원현(荳原縣), 태강현(泰江縣)으로 개칭되었다. 후에 다시 낙안군으로 승격하였다. 원래는 현 벌교읍 고읍리에 관아가 있었으나, 고려 말 ~ 조선 초에 [[왜구]]가 들끓자 더 내륙인 낙안읍성 자리로 이전했다. === 조선 === [[파일:external/librewiki.net/Boseong_historical_1.png|width=60%]] ▲조선시대 이래 보성군(1914년까지 [[장흥군|장흥도호부, 장흥군]]의 돌출지였던 웅치면, 회천면 포함)과 낙안군의 영역을 현재의 읍면 경계를 참고하여 그린 지도. 큰 변동은 없었으며 이 영역이 1908년 낙안 폐군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원래 현재의 벌교읍 일대는 [[낙안읍성]]으로 잘 알려진 '''낙안군'''(樂安郡)이라는 독립된 고을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시대 이래로 낙안군의 최대 중심지는 낙안읍성 일대였고 벌교는 고을의 남쪽 변두리의 작은 포구 겸 장터 마을이었다. 고을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죽이는 등 범죄를 저질러 현으로 강등된 적도 몇 번 있지만 그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나주부 낙안군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 낙안군이 되었다. 장도(獐島; 노루섬), 여자도(汝自島) 등 낙안군이 관할하던 섬들은 신설된 [[돌산군]]으로 전부 이관되었다. === 폐군 === [[1907년]]에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통감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으며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이후로, 을사조약 이후 의병과 강제해산을 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합류로 [[정미의병]]의 성격이 바뀌어 항일 교전으로 확대된 시점이였다. 이 정미의병전쟁이 시작되어 지속된 1년 뒤인 [[1908년]]은 의병의 기세가 전국을 통틀어 7만 명을 넘겼을 정도로 매우 활성화된 시기였다. 이는 벌교와 낙안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다. 당시 낙안군 상황을 보면, 옆 고을 [[보성군]]에서 일어난 [[안규홍]]의 항일 의병 세력이 전남동부 쪽으로 뻗어나갔고 이곳 벌교에서도 항일 세력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안규홍의 의병은 실제로 일본군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강성했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규홍이 벌교 장터에서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 1명을 때려죽였다고 하고 이 때부터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1박 2일]] 초창기 독서퀴즈 때도 나왔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표현인데, [[21세기]]에는 [[조직폭력배]]와 연계되어 '지역 비하 표현'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표현이라 '지역 우대 표현' 중 하나이다.] 또한 좀 더 과거로 가보면 [[동학 농민 혁명]]이 있었던 때도 동학군이 낙안으로 집결하여 읍성과 그 인근을 초토화시킨 전력이 있었으며, 더 과거로 가면 [[임진왜란]] 중에 당시 낙안군수가 [[전라좌수영]] 소속으로 관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하여튼 그 해 양력으로 [[10월 15일]], 전남지역 행정구역 조정을 골자로 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72호가 발령되어 낙안군이 폐군되었다. 이 해에 낙안군 뿐만 아니라 다른 고을들 중에도 통폐합된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목록은 [[행정구역 개편/대한민국/역사]] 문서에 있다. 당시 전후상황을 보자면 낙안군을 해체시킨 일은 일제가 정미의병 활동에 대해 벌인 복수극이자, [[부군면 통폐합]]의 [[프로토타입]]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승정원일기]]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L02&moId=090&daId=210&gaLid=080&gaId=&yoId=&ilId=&leId=&NodeId=ms_k-L001&setid=607842&Pos=18&TotalCount=23&vipyunid=undefined|순종2년 9월 21일(계묘, 양력 10월 15일 목요일) 기록]]에서 "군의 폐합에 관한 건을 반포하였다"에 남아있다. > ○ 짐이 군(郡)의 폐합(廢合)에 관한 건을 재가하여 이에 반포하게 하노라. > 전라남도 옥과군(全羅南道玉果郡)을 폐하고 또 담양군(潭陽郡)의 일부인 덕면(德面)·대면(大面)·가면(加面)을 분리하여 모두 이를 창평군(昌平郡)에 합한다. 동도(同道) 화순군(和順郡)을 폐하여 능주군(綾州郡)에 합한다. > '''동도 낙안군(樂安郡)을 폐하여 그 일부인 내서면(內西面)·외서면(外西面)·동상면(東上面)·동하면(東下面)·초상면(草上面)·초하면(草下面)·읍내면(邑內面)은 순천군(順天郡)으로, 그 밖의 일부인 남상면(南上面)·남하면(南下面)·고상면(古上面)·고하면(古下面)은 보성군(寶城郡)으로 합한다.''' >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이를 통해 [[낙안군]]이 1908년 음력 9월 21일(양력 10월 15일)에 폐지되고 이때 [[낙안군]] 남부의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이 [[보성군]]으로, 나머지는 순천군(현 [[순천시]])로 분할편입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시행의 주체는 대한제국이지만 이 당시 일제의 강제로 인해 고종의 강제 퇴위가 벌어지고 정미의병전쟁까지 일어났던 1907년 이후라는 점, 그리고 이 정미의병전쟁에서 낙안군 지역이 매우 거센 의병활동이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 일제의 개입을 추정할 수 있다. == [[구한말]] 행정구역 == 낙안군은 읍내면, 내서면, 외서면, 동상면, 동하면, 초상면, 초하면,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지금의 벌교읍 지역은 옛 낙안군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일부), 동하면, 초하면(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벌교읍에 해당되는 이 낙안군 시절의 5개 면 이름 중 일부는 지금도 '남상조경', '남상향우회', '남하로', '남하향우회', '고상 백이동우회', '고상 이장협의회' 등 관습적 지명으로 남아 상호명, 도로명, 주민 단체명 등에 쓰이고 있다. 고상, 남상, 남하가 특히 잘 쓰이는 편. 현재 법정리와 옛 낙안군 면을 대응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 고상면 - 고읍리, 낙성리, 지동리, 추동리, 징광리 * 고하면 - 전동리 * 남상면 - 척령리, 칠동리, 옥전리, 마동리 * 남하면 - 장좌리, 영등리, 장암리, 대포리 * 동하면 - 연산리, 봉림리, 회정리, 장양리 * 초하면 - 호동리 * 불명 : 벌교리, 장도리 [[분류:전라남도의 폐지된 행정구역]][[분류:1908년 폐지된 행정구역]][[분류:순천시의 역사]]